시몬지파 명동센터 김♡송 간증문
안녕하세요. 2017년 1월에 신천지에서 나와 회심한 김♡송입니다. 신천지에 있었던 지난 일년 반, 그리고 나와서의 반년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신천지에 빠지기 전 저는 밝고 행복한 대학생이었습니다.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면서 알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기독교 연극팀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어 인터뷰를 해주었습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모자란 것이 없었지만, 신앙 부분에서는 제대로 기준을 잡지 못했던 저에게 ‘신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들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주 4회 말씀을 배우자고 하는 ‘따기’에서도 ‘말씀 배워볼래?’ 하는 말에 홀린 듯 따라갔습니다. 그룹 복음방의 하루하루는 즐거웠습니다. 친구들과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럴때마다 이 말씀을 다 배우고 나면 오히려 모두가 나를 이해해줄거라는 말이 위로가 됐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걸림도 사라졌습니다. 알바와 학교를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까지 배운다는 사실은 이제까지 세우지 못한 신앙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는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시험기간이 겹쳐 하루 이틀 잠을 자지 못해도 내 행동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다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제 고통의 시작은 신천지임을 알았을 때였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미 배운 것들과, 그리스도의 예언과 성취를 아는 곳은 이곳밖에 없다는 생각에 신천지를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끄럽게도 후에 알고 보니 이미 있던 사실을 그들의 식대로 다시 알려줬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가게 된 센터 6개월은 눈물로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신천지’라는 단어가 너무 무거워서, 목회를 하고 계신 부모님을 볼때마다 마음이 무너져서, 뭐하고 다니냐는 질문이 무서워서 항상 울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이겨내야 가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견뎠습니다. 적극적인 수강생은 아니었지만 할 일은 하는 수강생이었기에 큰 간섭은 없었습니다. 제가 하지 못한 것은 교회를 옮기는 ‘육적 유월’뿐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일년반동안 주일에 두 교회를 다니며 하루 세 번 이상의 예배를 드리는 강행군을 하게 됩니다. 힘들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했다고 하지만 아주 솔직히는 너무 바쁜 일상으로 누구를 의지하는 것보다 시간과 일에 몸을 맡기고 살았습니다. 센터만으로도 항상 벅찼는데 입교를 해야한다는 사실은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 날 길거리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입교하고 나서부터 제 인생은 마치 이미 꽉 찬 책장에 계속해서 두꺼운 책을 더 집어넣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활발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가진 저는 교리를 아는 것보다는 가지고 있던 원래의 스킬이나 성향으로 일을 맡았습니다. 처음 한달이 지나고 부구역장을 했고 한달이 지날때마다 새로운 일을 맡았습니다. 맡겨진 일은 곧잘 해낸다는 평가 덕분에 점점 일의 양은 많아졌고 어느순간 신천지가 맞다, 아니다를 생각할 겨를 없이 미친 듯이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부구역장에서 구역장이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말씀 공부 시간이 없어 이를 대신해 들었던 복음방 교사 수업 덕분에 얼떨결에 예비교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신천지에 입교한 1월부터 탈퇴직전 12월까지 머릿속에 걸어다닌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아침 7시 수업이 늦어서 뛰고, 끝나면 알바가 늦어서 뛰고, 피드백이 갑자기 잡혀서 뛰고, 복음방이 늦어서 뛰고, 다시 회의를 하러 뛰고, 그리고 나서 늦은 밤 집에가는 때가 되어서야 걸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구원에 더 가까워졌겠지, 오늘 이 친구들한테 잘해주면 우리 가족이 이곳에 올 때 더 편하게 올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친구들 앞에서는 항상 밝게 웃으려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무섭게도 무표정이 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 들어가는 집에서는 잠만 자고 밥만 먹는 일상이 반복됐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너무 사치스러워서 어느것에도 마음을 많이 쏟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종종 ‘기계’같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마음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점점 감정을 배제한 채 살아갔고, 길을 걸으면서 그 날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습관이 생길만큼 틈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뛰면서 가끔 ‘왜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고 하는데 일은 내가 다 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역원의 모략을 짜면서는 ‘왜 내 머리에 있는 생각을 얘기해주는데 이것이 신의 피드백일까, 은사를 왜 내가 만들어서 해야하는걸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문들은 일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작아서 생기는 생각이라고 넘겼습니다. 그런 질문이 남아있던 건 내 안에 남아있는 죄의 모습이 아니라, 맞는 생각을 했다는 간사님의 말을 들었을 때 왈칵 눈물이 났었습니다. 신천지 입교 후 12개월은 참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 신천지에 있을 때 쓴 일기들을 읽어봤습니다. 그 안에는 하루종일 정신없이 살았다는 얘기, 너무 힘들다는 얘기, 신천지라는 이름이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 그러니 공부해서 지식이 없어 망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얘기뿐이었습니다. 역사는 내일 이루어질 것처럼, 모략은 영원히 할것처럼 하라고 해서 모략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때문에 잠은 더 못자고 항상 초췌했지만 그래도 그게 선인줄 알았습니다. 친구들의 모략을 짜준것도 기억에 남는데 참 미안합니다. 자꾸 거짓말을 하게 해서, 그 거짓말이 더 이상 양심에 걸리지도 않게 해버려서 참 많이 미안합니다. 영원히 그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우연히 어머니가 발견하신 신천지 구역원의 편지를 시작으로 이렇게 극적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따금 나와서 ‘내가 신천지에 들어갈 줄도 몰랐지만 이렇게 나올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안에서 너무 힘들었다고 해도 견디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역사가 이루어지면 내 사랑하는 주변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소망을 잃고 나서 많은 박탈감, 짜증과 화가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음 예수님을 더 알고자, 내 신앙의 중심을 잡고자 했던 곳에서 저는 예수님은 더 알지 못했습니다. 제 신앙의 중심을 잡지 못했습니다. 항상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은커녕 이만희를 믿었고, 예수님이 구원의 역사를 마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됐습니다. 생각만으로 신천지에 대한 미련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와서 스스로 교리책을 펼쳐보고 공부하면서 완벽히 없어졌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문득 신인합일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확신이 들면서 미련조차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더 꿈같은 일년반이 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건 미련을 버리고 나서였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그랬겠지만 저 역시 이제 신앙을 그만하겠다 했었습니다. 더 이상 신앙이라는 것으로 내 인생을 괴롭게 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습니다. 거짓말한 것들이 미안하고 빼준 가족의 노력이 고마워 후속만 듣겠다고 했었고, 후속교육을 듣는 중간에도 그만해도 될 것 같다고 도망가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당겨주고 하면서 교육을 다 마친 순간, 저는 제 인생 끝날까지 신앙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천지에 빠지기 전, 스스로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그리 기쁘지도 않지만 싫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신천지에 빠졌을 때, 기독교인이었음을 저주했습니다. 무교 친구들이 오픈된 후에도 잘 다니는 것을 보면서 항상 부러워했습니다. 일요일마다 하루종일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 힘들기만 했습니다. 애초에 기독교 집안이었음을, 제가 기독교인이었음을 신천지에 빠졌던 지난 1년 반 참 많이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기독교인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길거리의 불신자들을 향해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던 제가 이제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신앙을 쉬고 있는 친구들에게 옆에 좋은 신앙인 친구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이는 제 지난 1년 반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얘기해주는 듯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아직은 신앙이 어렵습니다. 궁금한 것은 차고 넘치고 옆길로 새기도 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게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다시 친구들과 노는 것이 제일 행복하고 미래를 꿈꾸는 것이 즐거운, 삶의 끝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부족한 사람을 꺼내주고 보살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