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22살인 알바♡♡ 선교사 자녀 황♡민 입니다. 원래는 어딜 가나 저의 소개를 이렇게 선교사 자녀의 입장으로 소개를 했는데 초대교회에 오니 이 소개가 더 어울릴 것 같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시몬지파 특전대와 명동성전에 6개월 반 있다가 올해 5월초에 나오게 된 황♡민 입니다.
사실 아직은 제가 온전히 회복되어 특별한 간증을 할 수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간증 가운데에 은혜가 있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부분이라고 믿기에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드립니다. 정말 보잘것없는 저이지만 이렇게 저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천지 이전의 저의 삶에 대해 우선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엄마 태에서부터 전도사 딸이 되어 태어나서는 강도사, 부목사, 선교사 자녀로 살아온 뼛속 골수부터 모태신앙인입니다. 10살까지는 외동으로 살다가 11살에 10년 차이가 나는 여동생이 생겼습니다.
저는 유치원 때 까지는 한국에 있다가 6살에 부모님과 영국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한국 학교를 다닌 적이 한번도 없고 초등학교 입학을 영국에서 했습니다. 영국에 약 2년 동안 있다가 이후에 부모님의 선교지가 된 알바♡♡로 가게 되었습니다.
알바♡♡ 수도 티라나에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기독교 국제학교가 있어서 그 곳을 다녔고 한국 선교사자녀들과 외국 선교사자녀들이 함께 있는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 어울리며 컸습니다. 어려서 가서 그런지 엄청나게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시간들은 많지 않지만, 제일 잊지 못 하는 것은 어디를 가든지 현지인들이 애나 어른이나 마치 외계인을 보듯 시선이 항상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애나 어른이나 끼네제 끼네제 라고 부르며 중국인라고 놀리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시선과 놀리는 말들이 어린 저에게는 스트레스였고 짜증나게 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또한 저의 물건들, 예를 들어 문밖 신발장 쪽에 놓은 축구공을 훔쳐가는 것과 같은 행동들로 인해 어린 저에게는 현지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자 현지인들은 제가 이쁘다고 볼을 찢어져라 꼬집고 양쪽 볼에 침을 묻혀가며 4번 뽀뽀하기도 했지만 그것 마저도 저에겐 괴로움이었죠.
중간에 저희 가족은 Sheqeras 라는 시골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뭐 알바♡♡는 이미 수도 티라나부터 전기와 물이 자주 끊어지는, 오히려 물과 전기가 있는 시간이 더 드물어서 촛불 아래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기장판이 있어도 있으나 마나 해서 오리털 잠바를 입고 여러 겹의 이불을 덮고 자는 기억들도 많은데요. Sheqeras는 아예 물이라는 건 한 방울도 나오지 않고 전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저의 기억엔 가물가물한 그런 곳이었습니다. 물은 기르러 다녀야 했고 집 안에 화장실은 푸세식이었고 세수대야가 있어봤자 물이 안 나와서 양치질 하면 푸세식 화장실에다가 뱉어야 했는데 뱉다가 도리어 "우엑"하게 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식사 시간이면 파리들이 함께 식사 하고 주변에 학교가 없어서 저는 학교도 안 다니고 현지인 아이들과 때때로 놀며 지낸 그런 곳이었습니다. 정말 깡 시골이어서 덕분에 직접 옥수수도 따 보고, 현지인 아줌마께서 만들어 주신 갓 구운 따끈따끈한 식빵도 먹어보고, 주변에 말과 당나귀들도 있어서 당나귀 울음 소리도 밤에 들으면서 자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엽다고 안고 있던 토끼를 한 시간 뒤에 식사로 먹고 그런 추억들도 있습니다.
시골에서 보낸 시간들이 지난 후에 저희 가족은 다시 수도 티라나로 갔고, 거기서 살다가 동생 출산을 위해 한국을 왔다가 또 다시 알바♡♡로 들어갔다가 부모님의 사역이 잠시 국내 사역으로 바뀌어서 온 가족이 전남 광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희 부모님께서 소속되어 있으신 선교팀의 호남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두분 다 사역에 매진 하셨고, 저는 중2의 학업을 혼자 집에서 홈스쿨을 하며 보내야 했었습니다. 광주에는 친구 하나 없었고 친구들이 서울에 있어도 만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저는 홈스쿨을 하면서 더 외로움을 탔습니다.
원래 홈스쿨이라는 것은 집에서 부모님의 지도 하에, 부모님이 선생님이 되어서 학업을 진행하는 시스템인데 저는 그럴 수 있는 사정이 아니였고 부모님도 제가 스스로 잘 한다고 생각하셨는지 저는 저 스스로를 가르쳤습니다.
매일 주중에 아침부터 오후까지 혼자 빈 집을 지키면서 스스로 공부를 하도록 저 자신을 이끌어가야 했고 점심은 알아서 때가 되면 차려 먹고 다시 공부하고 해야 했습니다. 물론 부모님 걱정 끼쳐 드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가정의 재정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괜찮다고 하면서 1년 동안 견디며 진행했죠. 하지만 참다 못해 외로움의 끝을 본 저는 가족예배 후 저도 모르게 엄청 울면서 힘든 것을 다 토로했습니다.
그로 인해 저의 학교를 알아보고 입학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저희 가족은 이후에 충북 음성에 있는 기숙사 학교인 기독교 대안학교를 찾고 저는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어떻게 보면 토종 한국 애들을 맞서게 될 학교여서 그랬는지 엄청 긴장하면서도 학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입학 면접을 보러 갔었습니다. 결국은 이 학교에 중2로 입학을 해서 고3까지 마쳐서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학교였습니다. 학생들 가운데의 왕따, 언어폭력, 선후배 문화, 육체적 폭력을 보고 저는 도리어 한국에서 문화 충격을 느꼈고, 그런 분위기 가운데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 학교의 많은 아이들이 저에게 말 해주기로는 이 정도 애들이면 일반 학교에 비해 정말 착하고 순한 양 같다고 말했지만, 저는 평생을 순박하기만 했던 선교사 자녀들과 살며 자라 왔던 지라 저에게는 이 학교 아이들이 오히려 무시무시 해 보였습니다. 이해 안 되는 관점, 행동, 생각들도 많았고 학교의 규정들 만으로도 답답한 학교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절대로 엄마아빠랑 떨어져서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저였지만 이 학교에 입학 함으로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돼서 광주에 있는 가족은 한 달에 한 번씩만 외박해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1이 되어서는 가족이 알바♡♡로 돌아가게 되어서 부모님은 제가 한국에 남아서 이 학교에서 교육을 마칠 것인지, 가족과 함께 알바♡♡로 갈 것인지를 제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는데, 저는 마음으로는 흔쾌히 원하는 선택은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교육적인, 재정적인, 환경적인 것을 고려해서 끝내 한국에 남아서 다니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광주와 충청북도로 떨어져 있는 것도 겨우 익숙해 졌는데, 한국과 알바♡♡로 떨어져 있는 것은 저에게나 가족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알바♡♡로 떠나기 전에 저와 헤어지며 힘들어했던 엄마의 모습이나 저 자신의 기억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돌아 보면 정말 많이 힘들고 어렵고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던 순간들이 많아서 제가 다른 동기들만큼은 학교에 대한 정이 없지만, 저에게는 여러 가지 면으로 성장 하고, 배우고, 성숙해지고, 훈련이자 연단의 시간들이었기에 감사함으로 남습니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더욱 우리나라 문화를 알아가고 사실은 한국말도 늘고 한국 사람들을 더 이해하고 한국인으로서 저의 정체성도 제 안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선교사 자녀들 가운데 일어나는 어려움이 정체성에 대한 혼란입니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디에 속해 있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인데요. 저는 정체성 혼란을 겪지 않아서 잘 공감을 못하고 있다가 한국에서 기숙사 학교를 다니면서 그 학교 학생들과는 제가 100프로 어울릴 수 는 없고, 그들 중에 여러 면에서 저와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을 수 없다고 저 스스로가 느끼고 판단 하고서는 오직 알바♡♡에서 어려서부터 어울려서 지낸 선교사 자녀들이 저와 100프로 맞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여름 방학 때 나와 온전히 모든 것을 나누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러 알바♡♡에 간다는 큰 기대와 기쁨을 안고 갔지만, 막상 가서 친구들을 만나보니 제가 한국에서 보낸 시간들이 알바♡♡의 선교사 자녀들과는 함께 하지 못 하고 다른 삶을 살아온 시간들이 되어서 예상과 기대와는 달리 알바♡♡ 선교사 자녀들 사이에서도 온전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어디에도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이 되어 정말 힘들었고, 하나님이 저를 다른 선교사 자녀들과 쭉 같이 있게 하지 않으시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게 하셨다고 생각하며 원망했지만, 도리어 하나님은 긍정적으로 감사하게 이 경험을 통해 제가 오히려 양쪽을 다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 신천지에 빠지게 된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 저의 대학 생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독일 브레멘에 야콥스 대학 이라는 대학에 입학 해서 1년 동안 통합 사회과학을 전공하며 공부했습니다. 원래는 고2때 한국 대학을 준비하다가 더 국제적인 무대를 위한 경험, 새로운 문화 경험을 위해 유럽 대학을 준비했고, 입학하게 된 야콥스 대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믿어 가게 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한국사회 속에 살아가다가 다시 국제 사회로 들어가는 것이 설레면서도 약간은 두렵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년의 대학생활은 예상 보다 힘들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대학 생활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것이겠지만...저는 국제 사회 속에 다시 적응 하는 것, 대학의 공부 방식, 독일의 적극적으로 참여 해야만 하는 교육 방식, 한국 사람이 많지 않은 은근한? 외로움 등이 여럿이 겹쳐 힘들었습니다. 겨우 한국식으로 적응을 해놨더니 다시 반대로 적응하고자 하니 쉽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대학이 모두 3년제여서 전공 수업을 1학년 때부터 바로 들어 가는데 전공도 제가 예상 했던 것보다도 너무 이론적 이었고, 광범위했고, 조금이라도 흥미롭겠다고 기대했던 수업들도 기대 이하여서 전공에 대한 회의감도 느꼈습니다. 사회과학을 선택한 것은 UN과 같은 국제기관에서 청소년들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사람으로 일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사실 이 꿈을 품게 된 것에는 제가 지금까지 자라 온 환경과 상황들의 영향도 있고 아빠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아빠가 항상 어려서부터 국제 무대에서 일하는 큰 꿈을 꾸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고, 또한 제가 비전을 찾던 시기에 UN과 같은 기구에서 일하는 것의 얘기를 좋게 말씀하셨었습니다. 특별한 비전을 품고 있지 못했던 저는 고2 때쯤 비전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청소년 쪽으로 국제 기관에서 일하겠다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청소년들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된 것은 학교 학생들의 좋지만은 않은 모습들의 영향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 꿈이 저에게 열정을 키워주고 공부가 힘들면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고 원동력이 되어주는 꿈은 아니었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한국에서 여름방학을 보낸 후 학교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생각에 너무 힘들었고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여름 방학 동안에 한창 휴학을 해보는 것에 대한 고민도 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보곤 했습니다. 결국 9월에 독일로 돌아가긴 했지만 막상 학기를 진짜 시작하다 보니 엄청난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느껴져서 만성 두드러기까지 생겨서, 결국은 휴학을 해서 뮤지컬 배우로 준비하는 길을 도전 해보고 싶은 저의 마음을 부모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뮤지컬을 언급한 것은 엄마 아빠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노래와 연기에 관심이 있었고, 노래는 배워보고 싶어서 부모님께도 몇 번 말씀 드렸지만 부모님은 제가 그다지 진지하지 않고 열정이 있지 않은 것 같아 적극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아서 저는 그냥 조용히 그 작은 바램을 마음 속에 묻어 두었었습니다.
대학 1학년이 그렇게 힘들고 나서 저는 여러 가지 생각과 고민 끝에 늦기 전에 아직 더 어릴 때 한번 미련 없이 뮤지컬을 도전 해보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결심하고 엄마 아빠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 해보자고 말씀 하신 부모님의 말씀과 저 또한 하나님께서 주실 응답이 가장 중요했기에 묵상 중이었던 예레미야 말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여러 장을 계속 읽어도 명확한 답은 없고, 그냥 잘못된 길을 가면 저주 받는 다는 말씀들이 보였고, 그저 제 느낌상으로 왠지 하나님이 이미 보여주신 야콥스 대학교 라는 길에 머무르라고 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구절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마음도 부정했습니다.
부모님이랑 상의를 했을 때 아빠가 아빠도 본인이 마음으로는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다르게 인도하시는 음성에 힘들지만 순종함으로 나가야 했던 경험들이 있었기에 정말 많이 공감할 수 있다며 하지만 그 가운데서 순종함이 귀하다는 것을 얘기 해주셨고, 저도 머무르기로 마음 먹었지만…그날 밤에 저는 하나님께 서러워서 엄청 울면서 부모님께 심정을 토로 했습니다.
이전에 마음이 힘들거나 좋지 않으면 말씀을 묵상해서 받은 말씀으로 마음이 평안을 얻었었는데, 이번에는 왜 답을 얻은 것 같은데도 마음이 평안하기는커녕 도리어 너무너무 힘든지, 그리고 그 동안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순종하며 잘 살아 오고 부모님께도 한번도 반항하지 않고 살아 왔는데 왜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처음으로 스스로 진짜 하고 싶은 것을 막으시는지…어릴 때 엄마아빠도 예술 쪽으로 해보고 싶었던 내 꿈을 막은 것만 같았데 왜 하나님 마저 또 그러시는지 정말 너무너무 서러워서 울면서 얘기 했습니다.
결국은 마음을 다잡아도 계속 몇 일간 힘들어하던 저에게 부모님은 해보라고 말씀을 하셨고, 그건 마치 저에게 허락의 사인과도 같았고, 그저 기도하기로는 하나님께서 정말 정말 원하지 않으시다면 정말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제가 한국에 가는 휴학 절차를 막아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휴학이 불가능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오히려 이 휴학은 정말 순조롭게 잘 진행 되었고 마침 정말로 작년 9월 중순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알아보면서 시작 했고, 그러면서도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우선으로 두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즐거워하며 발레를 배우고 보컬 트레이닝을 잘 배우고 있다가 10월에 고속터미널역 지하상가에서 모든 것이 시작 되었습니다. 전철을 타러 가려고 하다가 2 남녀 청년들이 다가와서 "죄송하지만 혹시 잠깐 시간이 되세요? 저희가 이번에 한국 청년들을 위한 토크쇼를 준비 중인데 짧게 인터뷰 가능하신가요?"라고 해서 저는 왠지 그 날 따라 응해줄 여유를 갖고 상냥하게 대답해주고, 그들이 물어 보지도 않은 것들 이상으로 저에 대한 모든 것을 얘기 해주었습니다. 얼마나 알곡이었을지 참…
그리고 그날 저는 머물고 있던 선교사 자녀 숙소로 돌아가서 함께 살던 선교사 자녀들과 부모님께 그 날 있었던 신기하고도 놀라운 정말 특별한 만남에 대해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때 부모님은 들으시고 저에게 조심하라고, 그런 곳은 이상할 경우가 있다고 주의를 주셨지만, 저는 그다지 심각하게 안 받아들이고 넘겼습니다.
몇 일 뒤에 당연히 "어이쿠나 당첨이 되셨어요"라는 전화를 받아서 기분 좋게 더 깊은 인터뷰에 응해주었습니다. 결국은 저의 복음방 교사가 될 여자를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하면서 이 분은 본인도 선교사 자녀이고 예술인들의 심리상담자라는 모략을 쓰며 자기 얘기를 쭉 나눠 줬습니다.
그러면서 끝판에 저에게 말 하는 것이, "제가 같이 프로그램을 하는 교수님이 예술 쪽으로 기독교 인재를 양성하셔서 실제로 현직 뮤지컬 배우들과 가수들이 있는데, 이 교수님이 아무나 받지는 않으시고 정말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청년들만 특별히 받으셔서 양육 해주세요. 저도 그래서 아무에게나 제안을 하지 않는데, 제가 이제 곳 외국을 나가서 한달 전에 하나님께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정말 마지막으로 제가 이 기회를 줘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알게 해주세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갑자기 머리 말리면서 그 기도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민씨 얘기를 들어보니까 정말 하나님에 대한 마음도 있고 말씀도 사모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그때 한참 교회도 어디로 갈지 고민 중이었었습니다. 또한 이 인터뷰 자리에 나오면서도 선교사 자녀 친구가 제게 "요즘에 그런거 이단 많으니까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라고 했어서 그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기에 제가 하나님께서 그 만남 가운데 함께 하여 주시고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하고 갔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제안을 듣자 마자 얼씨구나 하고 제가 기도하며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을 다 말해버리고 긍정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분이 "정말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정말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겠어요?" 해서 저는 도리어 "저는 뮤지컬과 하나님 중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함으로서 "나 잡아가세요"한 샘이었습니다. 그쪽에서는 대박 알곡이라고 생각하며 좋아했겠죠.
그렇게 해서 복음방 생활을 하면서 저는, '내가 엄청 교만했구나, 정말 맹신 했구나, 성경도 몰랐구나' 하면서 엄청나게 헛된 감정들에 휩싸이고 결국 교수님이라는 분을 만나고 그분과의 심화된 복음방도 이어서 했습니다. 교수라는 사람은 나중에 알고 보니 시몬 지파 특전대 대장이었고 저는 특전대에 전도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교수라는 사람과 배울 때도 엄청 의심의 눈초리와 '어디 한번 끝까지 제대로 말하나 보자'라는 생각으로 들었지만, 결국은 '헉, 이런 말씀이. 힉, 이런 뜻이 있다니. 와 대박. 허어어어' 하면서 좋아하고 들었습니다. 10월 중순이 돼서는 저는 배우던 발레와 보컬도 다 내려놓고 특전대에서 준비한 "올인팀"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저는 온전히 저의 하루 하루를 그곳에 정말 올인 했습니다.
복음방 생활을 2달 가까이 한 후에 저는 오픈날을 통해 그 곳이 S 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S에 대해 아는 것은 고작 전남 광주에 살 때 부모님이 "여기는 S라는 이단이 많아"라고 하셔서 S =이단 밖에 몰랐고, 이미 그때에는 2달 동안 매일 하루 종일 S에 취해 있었기에 처음에 충격 외에는 잘 받아 들이고 다녔습니다.
S에서는 저의 책임감 갖고 일하는 성격을 이용해서 복음방 때는 올인팀장이라는 타이틀로 저로 헌신하게 하고, S 오픈 되고 나서는 119-1기 반장이라는 타이틀로 헌신하게 하고 이후에도 외국인팀장으로 헌신하게 해서 정말 저의 일주일의 7일은 새벽 7시 전에 집을 나가서 밤 11시 넘어 도착하는 생활로 계속되었습니다. 정말 군소리 없이 열심히 일해 줬건만 혼나기도 여러 번 혼나고 제 자신도 엄청 자책하곤 했습니다.
중간 중간에 성경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고 개인적으로 묵상하고 싶고 약간의 의심 가는 부분들이 있어 질문 하고 싶어도, 밤에는 골아 떨어지기 직전까지 핸드폰으로 불 나게 보고 하랴 나머지 시간은 거기에 헌신하랴, 정말 성경을 볼 시간이 안 주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초등 중등을 듣고서 계시록을 듣기 2틀 전이었던 5월 4일에 저는 이모네 가족과 심야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서 이모가 "얘들아 내려"라고 하셔서 저도 내리려던 찰나에 오른쪽에는 아빠가, 왼쪽 차 문에서는 엄마가 갑자기 등장하는…알바♡♡에 계셔야 할 이 두분이 제 눈 앞에 나타나 정말 한 3초 동안은 '내가 꿈을 꾸나' 싶어서 멍하니 엄마를 쳐다 보기만 했습니다.
그러고서는 차를 타고 가면서 저는 눈물을 흘리며 엄마 아빠와 타협을 하려고 했고 속으로는 엄청 기도를 했습니다. 저를 운전해서 제3의 장소로 데리고 가주신 (나중에는 천사의 역할을 해주셨음을 깨우치게 된) 분의 깜깜해서 보이지 않는 얼굴을 백미러로 살피며 속으로 '저 분이 바로 그 진짜 용의 자식이라는 진용식이라는 분인가' 하면서 뭣도 모르고 엄청 경계심을 가졌습니다.
이후에 저는 간사님을 통해 이단 상담을 들으면서 이단의 계보를 들으면서 절반은 와르르 깨져버렸습니다. 처음에 이만희씨가 낚시하고 놀고 있는 실상 영상을 보면서는 속으로 "흥. 그래 이쯤이야. 선생님도 좀 쉬고 취미 생활 하실 수도 있는 거지!" 하며 합리화를 했지만, 지금은 그 안에 있을 때 어떻게 감히 보혜사 성령을 받은 이긴자 선생님 이만희씨의 엉덩이를 김남희씨가 치는 영상을 아무렇지 않다고 받아 들였는지 이해가 안될 뿐입니다.
나오고 나서 저는 안에 있을 때 외국인들을 S에 빠지게 무진장 도와줬던 것이 저였기 때문에, 도리어 빼 내는 일에 그만큼 열성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 해서 시작하게 됐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그 외국인 기수 전체를 1명 외에는 다 순조롭게 나올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 일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저는 저의 신앙의 회복이 하나도 되지도 않은 상황이었기에 제가 부여한 것은 정말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정말 저를 도구로 사용 해주셨을 뿐이었습니다.
후속 교육을 들으면서도 초반에 저는 이미 회복 되었다는 교만함과 착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도 지속되고 있던 영적 싸움의 모습들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인해 힘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내가 이전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했던 것도 아니고, 말씀도 개인적으로 항상 묵상 하고, 내가 이미 구원 받았다는 믿음도 있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내가 왜 빠졌던거지? 빠졌던게 내 잘 못 인건가? 아님 하나님이 그냥 허락하신 경험인가? 그렇다면 내가 뮤지컬 도전하려고 했던 거는? 하나님이 아예 강력하게 신천지로 막으시면서 안 된다고 하시는건가? 그저 시도하는 것 조차도?' 이렇게 신앙과 진로가 합쳐져서 저는 이런 질문들로 매우 힘들었고 결국은 하나님께 '몰라요 하나님. 이 맘 바꾸실꺼면 알아서 하세요. 저는 제가 제 맘 지금 못 바꿔요. 바뀌어야 한다면 하나님이 바꿔주세요.' 라고 기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 이 모든 일을 돌아보면 정말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구원의 핵심 중 하나인 은혜에 대해 정말 마음으로는 이전에 몰랐다면, 이번 일을 통해 도저히 사람의 생각과 이해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더 마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직도 온 마음을 다해 기쁘게만 고백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정말 최고로 신뢰할 수 있는 인도하심이고 그 인도하심을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 나에게 더 없는 기쁨이 된다는 것. 하지만 그렇지 아니 할지라도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으로도 하나님은 결국 선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이시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 약간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의 모습처럼 반항 하고 있는 것들이 있지만, 결국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저는 이전 보다 더욱 굳센 믿음의 선물을 받았다고 확신 합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모태신앙인으로서 너무 쉽게만 느껴졌던 믿음이 무신론자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그냥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선물이라는 것과, 믿기 힘들어하는 무신론자의 입장을 경험하고 이해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단이 판 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단에 관심도 없고 경계심도 없고 빠져 있는 사람들보고 그저 쯧쯧 했던 제가 이제는 현실을 알게 되고 도리어 다른 영혼들이 이렇게 다치고 미혹 되는 것을 예방 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최근 몇 일간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누다 보니, 거의 만난 친구마다 이단의 경험을 본인이 또는 친척이나 가족 중에 경험한 적이 없는 경우가 없을 정도로 정말 이 일이 심각하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 사역을 위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놓고 정말 사랑의 마음으로 헌신 해주시는 목사님, 전도사님, 간사님들과 함께 중보 하시는 초대교회 성도님들의 모습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하실지 제가 느끼고 가는 것 같습니다. 저 밖에 선교지들 만큼이나, 어쩌면 더, 엄청난 선교지를 위한 사역이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정말 무너져 가는 한국 교회들을 공격하는 이단들을 맞서 싸워 이기며 교회들을 일깨워 주는, 살려 주는 초대 교회의 사역이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항상 어디에 있든지 초대교회를 위해 중보 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분들이 정말 많은데요. 정말 너무나도 큰 사랑과 헌신으로 섬겨 주시는 목사님 전도사님 간사님 두분 정말 정말 감사 드리고요 앞으로 이단 상담자가 되어주실 초대교회 성도님들께도 미리 감사드리구요, 저를 제보 해줘서 이 자리에 있도록 정말 큰 도움과 사랑을 준 ♡슬이와 ♡슬이네 가족 그리고 ♡림 언니와 ♡림언니네 가족께도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함께 하면서 즐겁고 고마웠던 후속 교육 동기들도 정말 고맙고 모두 이전 보다 더욱 굳센 믿음으로 기쁘게 감사하게 신앙생활 하는 동기들 되었으면 좋겠어요. 또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정말 하나님만 믿으며 바라보며 기도를 끊이지 않았던 엄마아빠도 감사합니다. 정말 제가 이렇게 빨리 깨우칠 수 있었던 건 분명 하나님께서 엄마 아빠의 믿음을 보시고 제 마음 안에 역사하셨다고 믿어요.
마지막으로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신실하게 이 모든 것 가운데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이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몬지파 특전대와 명동성전에 6개월 반 있다가 올해 5월초에 나오게 된 황♡민 입니다.
사실 아직은 제가 온전히 회복되어 특별한 간증을 할 수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간증 가운데에 은혜가 있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부분이라고 믿기에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드립니다. 정말 보잘것없는 저이지만 이렇게 저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천지 이전의 저의 삶에 대해 우선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엄마 태에서부터 전도사 딸이 되어 태어나서는 강도사, 부목사, 선교사 자녀로 살아온 뼛속 골수부터 모태신앙인입니다. 10살까지는 외동으로 살다가 11살에 10년 차이가 나는 여동생이 생겼습니다.
저는 유치원 때 까지는 한국에 있다가 6살에 부모님과 영국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한국 학교를 다닌 적이 한번도 없고 초등학교 입학을 영국에서 했습니다. 영국에 약 2년 동안 있다가 이후에 부모님의 선교지가 된 알바♡♡로 가게 되었습니다.
알바♡♡ 수도 티라나에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기독교 국제학교가 있어서 그 곳을 다녔고 한국 선교사자녀들과 외국 선교사자녀들이 함께 있는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 어울리며 컸습니다. 어려서 가서 그런지 엄청나게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시간들은 많지 않지만, 제일 잊지 못 하는 것은 어디를 가든지 현지인들이 애나 어른이나 마치 외계인을 보듯 시선이 항상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애나 어른이나 끼네제 끼네제 라고 부르며 중국인라고 놀리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시선과 놀리는 말들이 어린 저에게는 스트레스였고 짜증나게 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또한 저의 물건들, 예를 들어 문밖 신발장 쪽에 놓은 축구공을 훔쳐가는 것과 같은 행동들로 인해 어린 저에게는 현지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자 현지인들은 제가 이쁘다고 볼을 찢어져라 꼬집고 양쪽 볼에 침을 묻혀가며 4번 뽀뽀하기도 했지만 그것 마저도 저에겐 괴로움이었죠.
중간에 저희 가족은 Sheqeras 라는 시골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뭐 알바♡♡는 이미 수도 티라나부터 전기와 물이 자주 끊어지는, 오히려 물과 전기가 있는 시간이 더 드물어서 촛불 아래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기장판이 있어도 있으나 마나 해서 오리털 잠바를 입고 여러 겹의 이불을 덮고 자는 기억들도 많은데요. Sheqeras는 아예 물이라는 건 한 방울도 나오지 않고 전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저의 기억엔 가물가물한 그런 곳이었습니다. 물은 기르러 다녀야 했고 집 안에 화장실은 푸세식이었고 세수대야가 있어봤자 물이 안 나와서 양치질 하면 푸세식 화장실에다가 뱉어야 했는데 뱉다가 도리어 "우엑"하게 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식사 시간이면 파리들이 함께 식사 하고 주변에 학교가 없어서 저는 학교도 안 다니고 현지인 아이들과 때때로 놀며 지낸 그런 곳이었습니다. 정말 깡 시골이어서 덕분에 직접 옥수수도 따 보고, 현지인 아줌마께서 만들어 주신 갓 구운 따끈따끈한 식빵도 먹어보고, 주변에 말과 당나귀들도 있어서 당나귀 울음 소리도 밤에 들으면서 자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엽다고 안고 있던 토끼를 한 시간 뒤에 식사로 먹고 그런 추억들도 있습니다.
시골에서 보낸 시간들이 지난 후에 저희 가족은 다시 수도 티라나로 갔고, 거기서 살다가 동생 출산을 위해 한국을 왔다가 또 다시 알바♡♡로 들어갔다가 부모님의 사역이 잠시 국내 사역으로 바뀌어서 온 가족이 전남 광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희 부모님께서 소속되어 있으신 선교팀의 호남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두분 다 사역에 매진 하셨고, 저는 중2의 학업을 혼자 집에서 홈스쿨을 하며 보내야 했었습니다. 광주에는 친구 하나 없었고 친구들이 서울에 있어도 만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저는 홈스쿨을 하면서 더 외로움을 탔습니다.
원래 홈스쿨이라는 것은 집에서 부모님의 지도 하에, 부모님이 선생님이 되어서 학업을 진행하는 시스템인데 저는 그럴 수 있는 사정이 아니였고 부모님도 제가 스스로 잘 한다고 생각하셨는지 저는 저 스스로를 가르쳤습니다.
매일 주중에 아침부터 오후까지 혼자 빈 집을 지키면서 스스로 공부를 하도록 저 자신을 이끌어가야 했고 점심은 알아서 때가 되면 차려 먹고 다시 공부하고 해야 했습니다. 물론 부모님 걱정 끼쳐 드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가정의 재정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괜찮다고 하면서 1년 동안 견디며 진행했죠. 하지만 참다 못해 외로움의 끝을 본 저는 가족예배 후 저도 모르게 엄청 울면서 힘든 것을 다 토로했습니다.
그로 인해 저의 학교를 알아보고 입학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저희 가족은 이후에 충북 음성에 있는 기숙사 학교인 기독교 대안학교를 찾고 저는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어떻게 보면 토종 한국 애들을 맞서게 될 학교여서 그랬는지 엄청 긴장하면서도 학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입학 면접을 보러 갔었습니다. 결국은 이 학교에 중2로 입학을 해서 고3까지 마쳐서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학교였습니다. 학생들 가운데의 왕따, 언어폭력, 선후배 문화, 육체적 폭력을 보고 저는 도리어 한국에서 문화 충격을 느꼈고, 그런 분위기 가운데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 학교의 많은 아이들이 저에게 말 해주기로는 이 정도 애들이면 일반 학교에 비해 정말 착하고 순한 양 같다고 말했지만, 저는 평생을 순박하기만 했던 선교사 자녀들과 살며 자라 왔던 지라 저에게는 이 학교 아이들이 오히려 무시무시 해 보였습니다. 이해 안 되는 관점, 행동, 생각들도 많았고 학교의 규정들 만으로도 답답한 학교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절대로 엄마아빠랑 떨어져서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저였지만 이 학교에 입학 함으로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돼서 광주에 있는 가족은 한 달에 한 번씩만 외박해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1이 되어서는 가족이 알바♡♡로 돌아가게 되어서 부모님은 제가 한국에 남아서 이 학교에서 교육을 마칠 것인지, 가족과 함께 알바♡♡로 갈 것인지를 제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는데, 저는 마음으로는 흔쾌히 원하는 선택은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교육적인, 재정적인, 환경적인 것을 고려해서 끝내 한국에 남아서 다니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광주와 충청북도로 떨어져 있는 것도 겨우 익숙해 졌는데, 한국과 알바♡♡로 떨어져 있는 것은 저에게나 가족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알바♡♡로 떠나기 전에 저와 헤어지며 힘들어했던 엄마의 모습이나 저 자신의 기억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돌아 보면 정말 많이 힘들고 어렵고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던 순간들이 많아서 제가 다른 동기들만큼은 학교에 대한 정이 없지만, 저에게는 여러 가지 면으로 성장 하고, 배우고, 성숙해지고, 훈련이자 연단의 시간들이었기에 감사함으로 남습니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더욱 우리나라 문화를 알아가고 사실은 한국말도 늘고 한국 사람들을 더 이해하고 한국인으로서 저의 정체성도 제 안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선교사 자녀들 가운데 일어나는 어려움이 정체성에 대한 혼란입니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디에 속해 있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인데요. 저는 정체성 혼란을 겪지 않아서 잘 공감을 못하고 있다가 한국에서 기숙사 학교를 다니면서 그 학교 학생들과는 제가 100프로 어울릴 수 는 없고, 그들 중에 여러 면에서 저와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을 수 없다고 저 스스로가 느끼고 판단 하고서는 오직 알바♡♡에서 어려서부터 어울려서 지낸 선교사 자녀들이 저와 100프로 맞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여름 방학 때 나와 온전히 모든 것을 나누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러 알바♡♡에 간다는 큰 기대와 기쁨을 안고 갔지만, 막상 가서 친구들을 만나보니 제가 한국에서 보낸 시간들이 알바♡♡의 선교사 자녀들과는 함께 하지 못 하고 다른 삶을 살아온 시간들이 되어서 예상과 기대와는 달리 알바♡♡ 선교사 자녀들 사이에서도 온전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어디에도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이 되어 정말 힘들었고, 하나님이 저를 다른 선교사 자녀들과 쭉 같이 있게 하지 않으시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게 하셨다고 생각하며 원망했지만, 도리어 하나님은 긍정적으로 감사하게 이 경험을 통해 제가 오히려 양쪽을 다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 신천지에 빠지게 된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 저의 대학 생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독일 브레멘에 야콥스 대학 이라는 대학에 입학 해서 1년 동안 통합 사회과학을 전공하며 공부했습니다. 원래는 고2때 한국 대학을 준비하다가 더 국제적인 무대를 위한 경험, 새로운 문화 경험을 위해 유럽 대학을 준비했고, 입학하게 된 야콥스 대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믿어 가게 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한국사회 속에 살아가다가 다시 국제 사회로 들어가는 것이 설레면서도 약간은 두렵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년의 대학생활은 예상 보다 힘들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대학 생활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것이겠지만...저는 국제 사회 속에 다시 적응 하는 것, 대학의 공부 방식, 독일의 적극적으로 참여 해야만 하는 교육 방식, 한국 사람이 많지 않은 은근한? 외로움 등이 여럿이 겹쳐 힘들었습니다. 겨우 한국식으로 적응을 해놨더니 다시 반대로 적응하고자 하니 쉽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대학이 모두 3년제여서 전공 수업을 1학년 때부터 바로 들어 가는데 전공도 제가 예상 했던 것보다도 너무 이론적 이었고, 광범위했고, 조금이라도 흥미롭겠다고 기대했던 수업들도 기대 이하여서 전공에 대한 회의감도 느꼈습니다. 사회과학을 선택한 것은 UN과 같은 국제기관에서 청소년들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사람으로 일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사실 이 꿈을 품게 된 것에는 제가 지금까지 자라 온 환경과 상황들의 영향도 있고 아빠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아빠가 항상 어려서부터 국제 무대에서 일하는 큰 꿈을 꾸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고, 또한 제가 비전을 찾던 시기에 UN과 같은 기구에서 일하는 것의 얘기를 좋게 말씀하셨었습니다. 특별한 비전을 품고 있지 못했던 저는 고2 때쯤 비전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청소년 쪽으로 국제 기관에서 일하겠다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청소년들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된 것은 학교 학생들의 좋지만은 않은 모습들의 영향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 꿈이 저에게 열정을 키워주고 공부가 힘들면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고 원동력이 되어주는 꿈은 아니었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한국에서 여름방학을 보낸 후 학교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생각에 너무 힘들었고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여름 방학 동안에 한창 휴학을 해보는 것에 대한 고민도 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보곤 했습니다. 결국 9월에 독일로 돌아가긴 했지만 막상 학기를 진짜 시작하다 보니 엄청난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느껴져서 만성 두드러기까지 생겨서, 결국은 휴학을 해서 뮤지컬 배우로 준비하는 길을 도전 해보고 싶은 저의 마음을 부모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뮤지컬을 언급한 것은 엄마 아빠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노래와 연기에 관심이 있었고, 노래는 배워보고 싶어서 부모님께도 몇 번 말씀 드렸지만 부모님은 제가 그다지 진지하지 않고 열정이 있지 않은 것 같아 적극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아서 저는 그냥 조용히 그 작은 바램을 마음 속에 묻어 두었었습니다.
대학 1학년이 그렇게 힘들고 나서 저는 여러 가지 생각과 고민 끝에 늦기 전에 아직 더 어릴 때 한번 미련 없이 뮤지컬을 도전 해보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결심하고 엄마 아빠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 해보자고 말씀 하신 부모님의 말씀과 저 또한 하나님께서 주실 응답이 가장 중요했기에 묵상 중이었던 예레미야 말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여러 장을 계속 읽어도 명확한 답은 없고, 그냥 잘못된 길을 가면 저주 받는 다는 말씀들이 보였고, 그저 제 느낌상으로 왠지 하나님이 이미 보여주신 야콥스 대학교 라는 길에 머무르라고 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구절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마음도 부정했습니다.
부모님이랑 상의를 했을 때 아빠가 아빠도 본인이 마음으로는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다르게 인도하시는 음성에 힘들지만 순종함으로 나가야 했던 경험들이 있었기에 정말 많이 공감할 수 있다며 하지만 그 가운데서 순종함이 귀하다는 것을 얘기 해주셨고, 저도 머무르기로 마음 먹었지만…그날 밤에 저는 하나님께 서러워서 엄청 울면서 부모님께 심정을 토로 했습니다.
이전에 마음이 힘들거나 좋지 않으면 말씀을 묵상해서 받은 말씀으로 마음이 평안을 얻었었는데, 이번에는 왜 답을 얻은 것 같은데도 마음이 평안하기는커녕 도리어 너무너무 힘든지, 그리고 그 동안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순종하며 잘 살아 오고 부모님께도 한번도 반항하지 않고 살아 왔는데 왜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처음으로 스스로 진짜 하고 싶은 것을 막으시는지…어릴 때 엄마아빠도 예술 쪽으로 해보고 싶었던 내 꿈을 막은 것만 같았데 왜 하나님 마저 또 그러시는지 정말 너무너무 서러워서 울면서 얘기 했습니다.
결국은 마음을 다잡아도 계속 몇 일간 힘들어하던 저에게 부모님은 해보라고 말씀을 하셨고, 그건 마치 저에게 허락의 사인과도 같았고, 그저 기도하기로는 하나님께서 정말 정말 원하지 않으시다면 정말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제가 한국에 가는 휴학 절차를 막아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휴학이 불가능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오히려 이 휴학은 정말 순조롭게 잘 진행 되었고 마침 정말로 작년 9월 중순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알아보면서 시작 했고, 그러면서도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우선으로 두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즐거워하며 발레를 배우고 보컬 트레이닝을 잘 배우고 있다가 10월에 고속터미널역 지하상가에서 모든 것이 시작 되었습니다. 전철을 타러 가려고 하다가 2 남녀 청년들이 다가와서 "죄송하지만 혹시 잠깐 시간이 되세요? 저희가 이번에 한국 청년들을 위한 토크쇼를 준비 중인데 짧게 인터뷰 가능하신가요?"라고 해서 저는 왠지 그 날 따라 응해줄 여유를 갖고 상냥하게 대답해주고, 그들이 물어 보지도 않은 것들 이상으로 저에 대한 모든 것을 얘기 해주었습니다. 얼마나 알곡이었을지 참…
그리고 그날 저는 머물고 있던 선교사 자녀 숙소로 돌아가서 함께 살던 선교사 자녀들과 부모님께 그 날 있었던 신기하고도 놀라운 정말 특별한 만남에 대해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때 부모님은 들으시고 저에게 조심하라고, 그런 곳은 이상할 경우가 있다고 주의를 주셨지만, 저는 그다지 심각하게 안 받아들이고 넘겼습니다.
몇 일 뒤에 당연히 "어이쿠나 당첨이 되셨어요"라는 전화를 받아서 기분 좋게 더 깊은 인터뷰에 응해주었습니다. 결국은 저의 복음방 교사가 될 여자를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하면서 이 분은 본인도 선교사 자녀이고 예술인들의 심리상담자라는 모략을 쓰며 자기 얘기를 쭉 나눠 줬습니다.
그러면서 끝판에 저에게 말 하는 것이, "제가 같이 프로그램을 하는 교수님이 예술 쪽으로 기독교 인재를 양성하셔서 실제로 현직 뮤지컬 배우들과 가수들이 있는데, 이 교수님이 아무나 받지는 않으시고 정말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청년들만 특별히 받으셔서 양육 해주세요. 저도 그래서 아무에게나 제안을 하지 않는데, 제가 이제 곳 외국을 나가서 한달 전에 하나님께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정말 마지막으로 제가 이 기회를 줘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알게 해주세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갑자기 머리 말리면서 그 기도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민씨 얘기를 들어보니까 정말 하나님에 대한 마음도 있고 말씀도 사모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그때 한참 교회도 어디로 갈지 고민 중이었었습니다. 또한 이 인터뷰 자리에 나오면서도 선교사 자녀 친구가 제게 "요즘에 그런거 이단 많으니까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라고 했어서 그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기에 제가 하나님께서 그 만남 가운데 함께 하여 주시고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하고 갔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제안을 듣자 마자 얼씨구나 하고 제가 기도하며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을 다 말해버리고 긍정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분이 "정말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정말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겠어요?" 해서 저는 도리어 "저는 뮤지컬과 하나님 중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함으로서 "나 잡아가세요"한 샘이었습니다. 그쪽에서는 대박 알곡이라고 생각하며 좋아했겠죠.
그렇게 해서 복음방 생활을 하면서 저는, '내가 엄청 교만했구나, 정말 맹신 했구나, 성경도 몰랐구나' 하면서 엄청나게 헛된 감정들에 휩싸이고 결국 교수님이라는 분을 만나고 그분과의 심화된 복음방도 이어서 했습니다. 교수라는 사람은 나중에 알고 보니 시몬 지파 특전대 대장이었고 저는 특전대에 전도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교수라는 사람과 배울 때도 엄청 의심의 눈초리와 '어디 한번 끝까지 제대로 말하나 보자'라는 생각으로 들었지만, 결국은 '헉, 이런 말씀이. 힉, 이런 뜻이 있다니. 와 대박. 허어어어' 하면서 좋아하고 들었습니다. 10월 중순이 돼서는 저는 배우던 발레와 보컬도 다 내려놓고 특전대에서 준비한 "올인팀"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저는 온전히 저의 하루 하루를 그곳에 정말 올인 했습니다.
복음방 생활을 2달 가까이 한 후에 저는 오픈날을 통해 그 곳이 S 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S에 대해 아는 것은 고작 전남 광주에 살 때 부모님이 "여기는 S라는 이단이 많아"라고 하셔서 S =이단 밖에 몰랐고, 이미 그때에는 2달 동안 매일 하루 종일 S에 취해 있었기에 처음에 충격 외에는 잘 받아 들이고 다녔습니다.
S에서는 저의 책임감 갖고 일하는 성격을 이용해서 복음방 때는 올인팀장이라는 타이틀로 저로 헌신하게 하고, S 오픈 되고 나서는 119-1기 반장이라는 타이틀로 헌신하게 하고 이후에도 외국인팀장으로 헌신하게 해서 정말 저의 일주일의 7일은 새벽 7시 전에 집을 나가서 밤 11시 넘어 도착하는 생활로 계속되었습니다. 정말 군소리 없이 열심히 일해 줬건만 혼나기도 여러 번 혼나고 제 자신도 엄청 자책하곤 했습니다.
중간 중간에 성경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고 개인적으로 묵상하고 싶고 약간의 의심 가는 부분들이 있어 질문 하고 싶어도, 밤에는 골아 떨어지기 직전까지 핸드폰으로 불 나게 보고 하랴 나머지 시간은 거기에 헌신하랴, 정말 성경을 볼 시간이 안 주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초등 중등을 듣고서 계시록을 듣기 2틀 전이었던 5월 4일에 저는 이모네 가족과 심야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서 이모가 "얘들아 내려"라고 하셔서 저도 내리려던 찰나에 오른쪽에는 아빠가, 왼쪽 차 문에서는 엄마가 갑자기 등장하는…알바♡♡에 계셔야 할 이 두분이 제 눈 앞에 나타나 정말 한 3초 동안은 '내가 꿈을 꾸나' 싶어서 멍하니 엄마를 쳐다 보기만 했습니다.
그러고서는 차를 타고 가면서 저는 눈물을 흘리며 엄마 아빠와 타협을 하려고 했고 속으로는 엄청 기도를 했습니다. 저를 운전해서 제3의 장소로 데리고 가주신 (나중에는 천사의 역할을 해주셨음을 깨우치게 된) 분의 깜깜해서 보이지 않는 얼굴을 백미러로 살피며 속으로 '저 분이 바로 그 진짜 용의 자식이라는 진용식이라는 분인가' 하면서 뭣도 모르고 엄청 경계심을 가졌습니다.
이후에 저는 간사님을 통해 이단 상담을 들으면서 이단의 계보를 들으면서 절반은 와르르 깨져버렸습니다. 처음에 이만희씨가 낚시하고 놀고 있는 실상 영상을 보면서는 속으로 "흥. 그래 이쯤이야. 선생님도 좀 쉬고 취미 생활 하실 수도 있는 거지!" 하며 합리화를 했지만, 지금은 그 안에 있을 때 어떻게 감히 보혜사 성령을 받은 이긴자 선생님 이만희씨의 엉덩이를 김남희씨가 치는 영상을 아무렇지 않다고 받아 들였는지 이해가 안될 뿐입니다.
나오고 나서 저는 안에 있을 때 외국인들을 S에 빠지게 무진장 도와줬던 것이 저였기 때문에, 도리어 빼 내는 일에 그만큼 열성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 해서 시작하게 됐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그 외국인 기수 전체를 1명 외에는 다 순조롭게 나올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 일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저는 저의 신앙의 회복이 하나도 되지도 않은 상황이었기에 제가 부여한 것은 정말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정말 저를 도구로 사용 해주셨을 뿐이었습니다.
후속 교육을 들으면서도 초반에 저는 이미 회복 되었다는 교만함과 착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도 지속되고 있던 영적 싸움의 모습들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인해 힘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내가 이전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했던 것도 아니고, 말씀도 개인적으로 항상 묵상 하고, 내가 이미 구원 받았다는 믿음도 있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내가 왜 빠졌던거지? 빠졌던게 내 잘 못 인건가? 아님 하나님이 그냥 허락하신 경험인가? 그렇다면 내가 뮤지컬 도전하려고 했던 거는? 하나님이 아예 강력하게 신천지로 막으시면서 안 된다고 하시는건가? 그저 시도하는 것 조차도?' 이렇게 신앙과 진로가 합쳐져서 저는 이런 질문들로 매우 힘들었고 결국은 하나님께 '몰라요 하나님. 이 맘 바꾸실꺼면 알아서 하세요. 저는 제가 제 맘 지금 못 바꿔요. 바뀌어야 한다면 하나님이 바꿔주세요.' 라고 기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 이 모든 일을 돌아보면 정말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구원의 핵심 중 하나인 은혜에 대해 정말 마음으로는 이전에 몰랐다면, 이번 일을 통해 도저히 사람의 생각과 이해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더 마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직도 온 마음을 다해 기쁘게만 고백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정말 최고로 신뢰할 수 있는 인도하심이고 그 인도하심을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 나에게 더 없는 기쁨이 된다는 것. 하지만 그렇지 아니 할지라도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으로도 하나님은 결국 선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이시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 약간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의 모습처럼 반항 하고 있는 것들이 있지만, 결국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저는 이전 보다 더욱 굳센 믿음의 선물을 받았다고 확신 합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모태신앙인으로서 너무 쉽게만 느껴졌던 믿음이 무신론자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그냥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선물이라는 것과, 믿기 힘들어하는 무신론자의 입장을 경험하고 이해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단이 판 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단에 관심도 없고 경계심도 없고 빠져 있는 사람들보고 그저 쯧쯧 했던 제가 이제는 현실을 알게 되고 도리어 다른 영혼들이 이렇게 다치고 미혹 되는 것을 예방 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최근 몇 일간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누다 보니, 거의 만난 친구마다 이단의 경험을 본인이 또는 친척이나 가족 중에 경험한 적이 없는 경우가 없을 정도로 정말 이 일이 심각하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 사역을 위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놓고 정말 사랑의 마음으로 헌신 해주시는 목사님, 전도사님, 간사님들과 함께 중보 하시는 초대교회 성도님들의 모습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하실지 제가 느끼고 가는 것 같습니다. 저 밖에 선교지들 만큼이나, 어쩌면 더, 엄청난 선교지를 위한 사역이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정말 무너져 가는 한국 교회들을 공격하는 이단들을 맞서 싸워 이기며 교회들을 일깨워 주는, 살려 주는 초대 교회의 사역이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항상 어디에 있든지 초대교회를 위해 중보 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분들이 정말 많은데요. 정말 너무나도 큰 사랑과 헌신으로 섬겨 주시는 목사님 전도사님 간사님 두분 정말 정말 감사 드리고요 앞으로 이단 상담자가 되어주실 초대교회 성도님들께도 미리 감사드리구요, 저를 제보 해줘서 이 자리에 있도록 정말 큰 도움과 사랑을 준 ♡슬이와 ♡슬이네 가족 그리고 ♡림 언니와 ♡림언니네 가족께도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함께 하면서 즐겁고 고마웠던 후속 교육 동기들도 정말 고맙고 모두 이전 보다 더욱 굳센 믿음으로 기쁘게 감사하게 신앙생활 하는 동기들 되었으면 좋겠어요. 또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정말 하나님만 믿으며 바라보며 기도를 끊이지 않았던 엄마아빠도 감사합니다. 정말 제가 이렇게 빨리 깨우칠 수 있었던 건 분명 하나님께서 엄마 아빠의 믿음을 보시고 제 마음 안에 역사하셨다고 믿어요.
마지막으로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신실하게 이 모든 것 가운데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이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