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신천지에서 1년 6개월 정도 있다가 나오게 된 장♡영 청년입니다.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살곤 하였습니다. 제가 되돌아본 저의 신앙은 사춘기 전까진 모든 생각이 하나님께 맞춰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늘을 보아도 땅을 보아도 하나님 생각을 많이 하며 언제나 항상 감사로 신앙생활을 해왔었습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머리가 점점 커지게 되어 많은 생각이 들었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이 아닌 제가 이해 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저의 틀에 하나님을 맞추려고만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겪는 모든 어려움들이 너무 버겁게만 느껴졌습니다.
가정에서, 신앙생활에서 사회생활에서 겪는 많은 삶의 굴곡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나는 힘든데 믿지도 않는 사람들은 그저 잘 지내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부도가 났고 TV 속에서만 보았던 빨간딱지를 실제로 보게 되었고 그 시점에 팔도 크게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수술로 인해 1년 동안 정상인으로 살지 못하게 되자 꿈도 없어졌고 팔에 큰 쇠를 달고 다닌다는 이유로 다른 시선, 다른 사람으로 취급받게 되다 보니 삶의 이유도 없어졌고 대인기피증도 생겼고, 매일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너무 힘들어 다음날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모든 걸 하나님께 원망으로만 돌렸던 것 같습니다.
또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님과 뜻이 어긋나는 모든 사역자를 다른 교회로 보내셨고, 성도들을 강대상에서 비판하기 바쁘셨습니다. 심지어 설교하시다가 저와 오빠가 듣고 있는 앞에서 저희 아버지 이야기도 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 어른들은 더 유치하고 잘 싸운다는 걸 초등학교 때부터 봐왔었고 아버지와 사역을 하시다 마음이 맞지 않는 장로님은 제 인사를 받아주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아버지는 교회를 옮기게 되셨습니다.
아버지가 30년 동안 섬긴 교회였지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나가시자 어른들은 교회에 남은 저희 남매에게 아빠는 잘 계시니? 사업은 잘되시니? 보고 싶다고, 교회 놀러 오라고 전해 드리라는 뻔한 거짓말들을 들어야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사역자분들께서 신앙인답지 못한 모습을 참 많이 볼 때마다 마음이 어려워졌었고 많은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행동이면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아무 노력도 안 하면서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거야 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받은 상처가 많다 보니 저는 제 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바빴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모습도 그렇게 싫던 어른들의 모습을 닮아 가는 걸 느꼈습니다. 제 모든 행동들이 진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닌 내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앞세우는 저 자신이 싫어졌고, 기도할 때 부탁만 하고 힘들 때만 하나님을 찾는 저 자신의 기도가 가증스럽게만 느껴졌습니다.
이런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과연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을까 라고 고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고민을 이야기 하면 그저 어린애가 힘들어 봤자 라고 하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대우했고 또 질문을 많이 하면 그것도 모르냐는 식에 대답을 들어왔기에 혼자서 많은 고민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었고 지방에서 자취하면서 다시 신앙을 회복하리라 좋아지리라 라는 다짐을 하고 학교 다니면서 섬길 교회도 등록하고, CCC선교 단체에도 들어갔습니다. 대학생이 되니 어릴 때부터 같이 믿음 생활하던 친구들이 성인이라는 명분아래 교회를 거의 다 떠나갔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며 떠나갔고, 저는 언젠간 다시 돌아올 친구들을 위해 믿음을 잘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학업을 따라 살아가다 보니 제 마음은 어느새 지쳐만 갔고, 저 또한 그저 교회만 나가지 그 친구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디자인학과라 과제가 너무 많아 항상 밤을 새우며 학업에도 최선을 다하려고 했고 신앙생활도 최선을 다하려고 했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학업으로 해야 할 일도 많았고 교회, 선교단체 활동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때 CCC 간사님께서는 ‘힘들지’ 보다는 모든 모임을 참여하게 강요하셨고 저는 CCC에서 임원으로 활동하였기에 아침 큐티 모임, 일대일 성경공부, 화요 기도회, 또래모임, 순장모임, 채플, 전도활동과 교회에서는 새신자부담당, 청년부 임원, 성가대, 찬양팀 싱어 등 너무 많은 사역이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버거워해도 사역자분들은 하나의 일을 감당하면 다른 것도 부탁하시며, 사역을 안 하면 하나님께서 그 재능을 가져가신다라는 말로 겁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하다 보면 더 하나님을 알아가겠지 하나님을 더 만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은 더 적어져 갔고 일을 하러 온 건지 하나님 만나러 온 건지 제 마음은 더욱 지쳐만 갔습니다.
교회분들도 선교단체 분들도 필요할 때만 찾으셨고 제가 학업으로 인해 모임에 불참하게 되면 정죄를 하시고, 전 교회와 다를 것 없이 권력이 바뀔까 봐 사람을 내리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이렇게 대학에 와서도 신앙 고민을 나눌 친구가 없었고 교회 친구들도 하나님 안에서 교제가 아닌 그저 세상 친구들 똑같았고 언니오빠 간사님들의 세상적인 모습들을 볼 때마다 진짜 참된 신앙인은 어떤 사람인지 과연 이 세상에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신앙인들은 있긴 있는 걸까? 나는 어떻게 신앙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되었고 이러한 고민은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심해졌습니다.
미대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서 저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이렇게 행복해라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친구들은 기독교 비판을 제게 와서 했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라고 물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내가 더 선하게 살아야지 생각했지만, 친구들은 제게 순둥이로 살면 당하기만 한다며 검어질 줄도 알라며 바보 같다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이 없는 곳에서 신앙을 지키는 건 너무 어려웠고 저는 과연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에 회의감이 들었고 아무리 봐도 참된 예배자는 있는 것인가 내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만 커지고 때가 묻은 저 자신이 너무 싫었고 신앙이 좋아지진 커녕 점점 더 안 좋아지고 힘든일이 더 생기게 되자 하나님이 계신 것일까 하며 차라리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안 믿겠다고 선언도 해보았지만 도저히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신앙은 회복될 거라며 방학 때 마다 집도 안 올라가고 자취방에 남아 새벽기도도 나가고 많은 수련회, 성경합숙 훈련도 받아보았지만 깊어지지 않는 교제가 너무 답답했고 수련회 때만 불타오르다 금방 식는 ‘제멋대로 신앙’하는 제가 너무 미웠고 저 자신이 더더욱 싫어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삼 학년 여름 방학 때 드디어 집에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왔을 때 여전히 저희 부모님은 정착한 교회가 없으셨기에 이번 방학은 교회를 돌아다니며 부모님이 정착하실만한 교회를 정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매 주일마다 아버지 매장 주변에 있는 교회를 거의 다 가보았지만, 교회 설교는 성경 말씀보다는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들을 수 있는 교훈들만 이야기하는 목사님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년 넘게 못 봤던 친한 친구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 친구가 바로 제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제가 고등학교 3년 동안 같은 반이었고 무신앙 이지만 하나님을 궁금해하던 친구라 선교부장이었던 제게 질문도 많이 하고 신앙이야기도 많이 듣고 하다가 고3 때부터 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기성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질문을 많이 하였는데 목사님께서 대답해 주신 적이 없었어 궁금한 걸 목사님이 대답을 못 하면 누가 가르쳐줘? 라는 말에 교회 언니들은 목사님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고 그렇게 계속 말씀 갈급해 하다가 저보다 먼저 신천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는 항상 신앙이야기를 솔직하게 많이 털어놓았는데 그날도 카페에서 함께 신앙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우연만남을 통해 선교사 언니를 소개받았고 그분은 신천지에서 말하는 제 교사님이 되었습니다.
그 교사님은 미국에서 청년 신앙 상담을 하시다 다시 한국에서 사역하신다며 소개받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되었고 제 고민을 듣더니 신앙이 바로 잡혀있지 않아서 그렇다며 신앙이 바로 잡힌 사람들은 그런 고민은 안 한다며 당당하게 간증을 해주셨고 교사님께서는 ‘저를 도와주고 싶다.’라며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만나게 된 두 번째 만남에 교사님께서는 제게 쿠키 모양에 사람을 그리시고 66개의 칸을 나누시더니 성경목록을 적어보라 하셨습니다. 모태신앙에다가 CCC에서 성경 합숙 훈련까지 받아가며 공부했지만 그새 까먹고 몇 개 쓰지 못한 제가 하나님께도 죄송하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제게 괜찮다며 그러면 아는 것만 색칠해보라고 하셨고 저는 아무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교사님은 ‘♡영아,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영이는 하나님도 모르고 너도 모르겠네?’ 라며 호세아 6장 6절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사,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것을 더 원한다 라는 그 말이 제 마음에 너무 크게 와 닿았고 선생님께서는 하나님을 알아가자며 복음방을 권하셨습니다. 하겠다고 하고 집에 오면서 너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밖에서 성경공부 하지 말라는 말이 떠올라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계속 기도했고 행당역에 내려서 아는 목사님께 전화를 하여 우연히 만나 성경 공부하게 되었다. 이단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라는 질문에 만나봐야 알지 그리고 성경가지고만 하는지 누구를 소개시켜주는지 봐 라고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본 사람을 이단이라 생각하면 못된 생각이겠지? 하며 집에 돌아가게 되었고 다음 날부터 복음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의심도 경계도 너무 많고 가족들이 다 기독교고 또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 이라 부모님께 거짓말하는걸 이해 못 하는 제게 선생님은 입막음을 매번 엄청 많이 시키셨고 복음방 공책도 공부하고 선생님이 가져가시고 의심을 줄이기 위해 연세대학교 안에서 복음방 했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과도 인사하는 걸 보여주시며 학식까지 먹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의심 들었고 만날 때마다 소속확인을 다시 했습니다. 그런 제게 선생님은 도리어 화를 내셨고 혼나면서 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을 의심해서 화가 나셨구나 라고 생각이 들어 선생님께 죄송해졌고 계속 만나게 되었습니다.
교사님은 성경으로만 이야기하시고 신앙이 바로 서 있는 다면 다른 것도 흔들리지 않는다며 항상 당당하셨고 저는 그런 선생님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복음방을 하던 중 선생님은 ‘나랑 6개월 동안만 공부하면 신앙이 바로 설 수 있다고’ 휴학을 권해 주셨고 제가 가장 고민하던 부분을 6개월이란 시간 만에 회복된다면 감사하다고 느꼈기에 어렵지만, 휴학을 결정하였습니다.
성경을 배워가는 재미는 이전과 너무 달랐고,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나게 해주신 게 다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자연스럽게 센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휴학도 했는데 더 큰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했기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신천지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센터 말씀은 제게 엄청난 임팩트를 주었고 강의를 들으면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매번 강의 때마다 우는 제 보습을 보시고 강사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며 더 많이 복습을 시켜주셨고 다른 수강생들보다 저를 특별히 신경 써 주셨습니다.
저는 ‘내가 이렇게 말씀을 몰랐구나, 이 말씀을 이제서야 알았구나’ 하는 죄송함뿐이었기에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수업시간 1시간 전에 가서 기도하고 전날 배운 걸 복습했고 시간이 될 때는 두 번 수업을 청강하였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센터에 혼자 남아 다시 테이프 들으며 복습했고 그날 배운 많은 성구들을 적어 가서 자기 전에 수기로 쓰며 또다시 묵상하였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하였던지라 초등과정이 끝날 무렵 이곳이 신천지라고 밝혀주었을 때 갈등을 겪었지만 기성교회에서 부패된 많은 모습을 직접 확인했다고 생각했고 전에 느끼던 하나님과는 차원이 달랐고 기성교회에서 궁금했던 모든 질문 하나하나가 퍼즐 맞춰지는 것 같아 이곳이 맞다고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이 이단이 판을 친다며 그들은 성경을 너무 잘 알아서 말도 하면 안 돼 라는 말은 들었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성경을 더 잘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풀리며 그렇게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하나하나 짚어갔기에 신천지라고 해도 괜찮았습니다.
신천지에서 하는 모든것들이 저에게는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걸 말씀 적으로 한다라고 느껴졌고, 특히 예배시간에 전원 출석이라는 말을 듣고 아! 진짜 참 교회라면 그래야하는 게 맞지! 라고 생각이 들었고 어떠한 질문을 해도 다 알려주시고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강사님이 대단해 보였고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점점 배우면 배울수록 신천지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제 마음이 더 커져만 갔고 다니던 디자인학원도 다녀서 뭐하나 라고 생각하며 귀한 말씀을 알았으니 제대로 몰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존심 없기로 소문났던 저는 센터를 다니며 자존심이 생겼고, 말씀 앞에서는 자존심을 세우자라고 생각하여 동기들보다 많은 성구를 외워 대답해야지만 직성이 풀렸습니다.
많은 성구 주소를 달달달 외웠고, 다른 사람보다 암기에 약했던 저는 영어단어도 그렇게 안 외웠었는데 성구 주소를 외우기 위해 단어장처럼 만들어 가지고 다녀 외웠습니다.
시험을 백 점 맞기 위해 센터 다니는 동안 친구 한 번도 안 만나고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항상 열심히 하는 제 모습을 보시고 강사님은 성경 역사이야기, 신천지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저는 센터 때부터 조장, 티엠담당, 노방담당등 많은 일을 맞아서 했습니다. 겁이 많아서 두려웠고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이긴자 선생님은 이제껏 하고 싶은 것도 못하시고 하나님 일만 하셨으니 나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못하는 걸 노력했습니다.
열심히 하는 제게 많은 걸 알려주고 싶으셨는지 담당 기수장님은 제 모든 걸 혼내시기 시작했습니다. 애기 같은 말투, 걸음걸이 옷 입는 것 모든게 혼이 났습니다. 동기들이 잘못해도 제가 혼이 났고, 매일 센터에 가서 기수장님만 만나면 혼이 났습니다.
이런 것까지 혼나야 하나? 할 정도로 매번 혼이 나는 제게 동기들은 큰 그릇이 될 거라며 위로했고 강사님은 혼나다보면 배울것이 많다며 혼낼 때는 어떻게 혼내는 게 지혜로울까를 배우라며 저를 다독여줬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신천지는 제가 꿈꿔왔던 신앙인들이 너무나 많아서 행복했습니다. 학교가 어디냐 이런 겉모습이야기가 아닌 전도이야기 뿐이고 모두 다 성경만 보고 나아 가는 모습이 참 진리가 있는 곳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신천지 안에서 어떤 힘듦이 있어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나 하나가 잘하면 위로는 삼대 아래로는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이 말씀처럼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제가 정말 사랑하는 돌아가신 할머니까지도 천국에서 만나고 싶었기에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느껴져서인지 새신자가 끝나기도 전에 팀장이라는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주어 주신 것에 감사했고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며 그 일을 감당해 나아갔습니다.
처음 사명을 맡은 제게 부장님은 늙어 보이게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오라고 하셨고 어머니도 꺾지 못하셨던 여자는 무조건 머리가 길어야 한다던 제 고집은 순종이라는 한마디에 숏컷을 하였습니다.
정장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가 예전에 입던 정장 치마를 매일 입고 다녔고, 집에서 손톱을 자를 시간조차 없을 만큼 바쁜 생활이 지속되었습니다.
가장 예쁠 나이에 자신을 가꾸기보다는 늙어 보이기 위해 길고 긴 치마를 입었고 예뻐 보이기 위한 화장이 아닌 늙어 보이기 위한 화장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20명 정도에 새신자 회원이 맡겨졌습니다.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띠동갑 차이가 나는 사람도 케어 해야 했고 어린 나이를 감추기 위해 말투, 행동을 어른스럽게 노력했습니다.
팀장의 사명은 제게 너무 버거웠습니다. 아침7시 기도회, 조회, 매일 성전 밟기, 전도단, 열매 현황, 하루에 2명이상 심방, 구역예배, 하루에 4개 이상 되는 취합들 등 모든 활동을 주관해 나가야 했고 새신자에 모든 생활패턴과 활동량을 보고해야 했습니다. 저는 성경지식도 없는데 가르쳐야하는 부담감이 있었고 사람들을 케어 하는 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매일 새신자에 불평불만을 들으며 좋게 생각하게 해주어야했고 하기 싫다는 걸 안 한다는 걸 어렵다는 걸 다독여서 하게 만들어야만했습니다. 힘들 땐 ‘나도 새신자인데…….’ 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다 감당할 수 있으니깐 주신 거라고 생각해 매일 기도로 나아갔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싫어했지만, 제사장이 되려면 연습해야 한다며 새신자 전체인원50명을 데리고 구역예배를 드리라는 부장님의 말씀에 순종 했고, 구역예배를 준비하려면 평소 낮엔 일이 너무 많아 공부하는 것도 눈치 보였기에 녹취본을 집에 몰래 가지고 와 밤을 새워서 준비를 하곤 하였습니다.
하루에 12시간도 넘게 잘 수 있던 제가 잠자는 것조차 죄송스러웠기에 하루에 4시간씩 자며 신천지 생활 해왔고 점심을 못 먹는 건 일상이었습니다.
매일 잠이 부족했던 저는 못 일어날까 봐 핸드폰을 꼭 쥐고 가슴에 대고 엎드려서 자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그렇게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와서 씻지도 않고 기절해서 잠든 적이 많았습니다.
구역보다 새신자에 할당량의 기준은 매우 높았고 새신자가 뛰는 게 당연하다는 부장님 말씀에 모든 활동량을 늘려야 했습니다. 하루에 다 할 수 없는 할당량이 내려왔기에 다음날 항상 혼이 났습니다.
하루는 부녀회집사님이 오셔서 자신의 열매가 힘들어 하는 게 다 제 탓이라며 저보고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오라고 화를 내신적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사명을 너무 빨리해서 불쌍하다고 했고 그런 절 동기들은 더욱 많이 챙겨주었습니다.
또 저는 아픈 것도 죄라고 생각하였기에 수술했던 팔이 아파도 감기 기운이 있어도 제 스스로 최면을 걸었습니다.
‘넌 안 아파 괜히 꾀병 부리는 거야’ 라고 제 자신을 타일렀습니다.
센터 때는 너무 어려 보인다고 혼이 났었는데 사명을 하니 사람들은 저를 5년 정도 된 사람인 줄 알았고 저를 모두들 기본 26~27살로 보았습니다. 그걸 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못 할 일이 없구나!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후 구역장을 하였고 16명의 구역원이 맡겨졌습니다. 사명을 하다 보니 예배를 제대로 드린 적이 없었고 앞자리에서 드리는 걸 좋아했지만 구역원을 기다려야 했기에 또 예배시간에 안 오면 집까지 찾아가야 했기에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예배에 안 나온 회원이 있으면 기도를 열심히 안 한 제 탓 같았고 그런 구역원 집 앞, 회사 앞 등 잠복도 많이 섰었습니다. 한 겨울날 8시간 동안 집 앞에 기다린 것도 있었습니다.
잠복 서다가 만난 구역원은 욕을 하며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만 잘못 한 것도 없는데 무조건 미안하다며 그걸 잘 타일러서 성전에 오게 해야만 했습니다.
또 신천지는 연락이 생명이라 핸드폰으로 보고 하는 일이 너무 많았고 잠깐 핸드폰을 안 보면 마플은 천개가 넘어갈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생활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도 일하시매 나도 일한다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또한 일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참고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올인 할 수 있는 것에 감사 했고, 하나님 일 하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했습니다. 저는 남들보다 늦게 왔으니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생각해 더 악착같이 노력했습니다.
교사 교육을 통과 한 사람이 대학부중 저 한 명뿐일 정도로 노력했습니다. 매일 저녁10시에 구역장 스피치 교육이 있었고 교육이 끝나면 11시 반이 되어 성전에서 나와 집에 가면 1시가 다 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늦게 들어가는 게 가능한 이유는 아버지가 인천에서 기러기아빠로 일을 하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예전에는 아버지와 따로 지내는 게 속상했었는데 신천지에서 일하면 일할수록 가족에 화목은 제게 불편할 뿐이었고, 살면서 가본 적 없던 가족여행을 가자고 할 때마다 저는 불안해하며 온갖 핑계로 둘러댔습니다.
2014년 후반이 되니 열매가 없으면 내어 찍어 버리라는 총회장님 말씀에 구역원들 열매를 맺게 해주고 싶었고 열매가 없는 구역원이 있다면 다 제 책임인 것 같았습니다. 구역장에 많은 일도 감당하면서 매일 노방을 나가 구역원에게 열매를 주었습니다.
작은 발로 홍대,신촌,이대,신도림,목동,구로디지털단지,신림등 하루에 많은곳을 돌아다녔기에 가끔은 못 걸을 정도로 발이 욱신거렸습니다. 가끔은 쉬고 싶었지만 매주 주일 사명자 회의 때 활동량이 적은 구역은 레드박스로 보였기에 안뛸래야 안 뛸수 없었습니다.
구역원들은 전반적으로 나이가 어려서인지 유리 멘탈 이였고 병아리처럼 항상 저를 쫓아다녔습니다. 구역장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서로 서로 질투했기에 골고루 한 명씩 특별하게 사랑을 주어야 했고 하루에 한 명씩을 꼭 울었기에 매일 구역원을 달래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구역원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구역을 하나 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구역원도 있었고 그런 내가 무슨 제사장일까 라는 생각이 들어 사랑하게 해달라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한 영혼을 감당하는 게 힘든 거라고 뼈저리게 느낄 때 예전에 새신자 팀장 때 맡았던 회원 2명이 사고처리가 되었습니다.
팀장님은 저보고 전화해서 사망처리를 알리라고 할 때 너무 충격적이고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영혼 한 명 감당하는 게 이렇게 부담스럽고 한 영혼을 그렇게 떠나보내야 하는 게 하나님께 죄송했고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신천지 생활을 점점 할수록 기성교회를 다닐 때처럼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이 점점 생겨났지만 다들 너무 바빠 그런 질문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다 꾹꾹 참아야만 했고 제 마음은 점점 강퍅해져 사명을 내려놓고 쉬고 싶었습니다.
매일매일 혼나는 것이 점점 지겨워졌습니다. 모든 걸 바꿔가야하는 게 힘들었고 나도 모르는데 아는 척 이해하는 척 거룩한 척 하는게 힘들고 내 성격도 내 목소리도 내 말투 행동도 다 바꿔야만 하는데 그럼 난 누군가, 완벽한 사람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완벽해 질수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며 그렇게 지쳐갔고 지치는 제 모습을 또 자책하며 참아갈 때 그런 고민조차 할 시간이 없어질 만큼 바쁘게 지낼 수밖에 없게 처음으로 교육하는 열매가 생겼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그 친구를 가르쳤지만 센터 언급을 했을 때 가기 싫었는지 의심이 생겼고 자신의 교회 전도사님께 이야기함으로 이런 저런 다리를 통해 저희 오빠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핍박이 터졌을 때 너무 무서웠지만,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이야기하시려고 하는 것 일까? 내 신앙을 지키는데 마지막 관문이구나 이겨내고 두려워질게 없는 신앙생활을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섭외부장님 섭외총무님 지역장님 모두 제 피드백을 도와주셨고 첫날 집으로 갈 때 아프면 부모님들이 불쌍해서 내버려 두신다고 해서 게보린 20알을 10알씩 나눠서 먹었습니다. 열나고 토하며 아프다고 불쌍한 척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핸드폰을 뺏기고 이메일로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았고 섭외부장님은 핍박을 이겨내고 섭외부 사명 같이하자며 ‘♡영이 너처럼 겁 많은 친구가 이기고 돌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핍박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고 생각할 것 같다고 꼭 이기자고 하셨습니다.
섭외 부장님께서는 집에만 있으라고 절대 어디 따라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부모님께 신천지 안가겠다고 했는데 아버지 말씀을 안 듣게 더 이상한 것 같아 악기 배달을 몇 번 따라갔었습니다.
그때 섭외 부장님은 매일 저희 집 앞에서 잠복을 서시며 이런게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가족들이 구리에서 상담 받는 걸 느낌으로 알아차렸고 그래서 집을 나올 계획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시 들어가라는 피드백을 받아 3번이나 나갔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4번째 탈출을 하기 전날 밤 저는 가족들에게 보쌈을 당했습니다. 사람 수부터가 밀러 저는 도망한 번 못 쳐 보고 그렇게 펜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두려웠지만, 부장님께서 분명 찾아오실 거라는 믿음이 있어 두렵지 않았습니다. 펜션에서 지내면서 부장님이 어른스럽게 행동하라는 말을 안 들어서 끌려온 것 같았고 역시 순종해야하는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장님이 너무 보고 싶었고 매일 꿈에 부장님이 나와서 위로해주셨습니다. 무서웠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평소에 실컷 자고 싶어 하던 내게 하나님이 쉴 시간을 주시는 걸 거야, 가족들을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3일을 버티고 나니 나머지 날들은 버티기가 쉬워졌습니다. 그래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4일을 더 버텼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이 정도면 3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끌려가면 상을 엎어 버리라며 부장님께서 ‘할 수 있어?’ 라고 물어보실 때 부장님께 ‘부장님 저 어린애 아니에요. 신앙 지키려면 뭘 못하겠어요. 다 할게요’ 라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차마 어머니가 차려오신 상을 엎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펜션에서 버티며 울면 지는 것 같아서 울지 않았습니다. 제가 끄떡없자 오빠는 신천지사람들이 너 버린 것 같다며 널 찾으러 오지 않는다고 할 때 마음이 흔들렸지만 내가 신고를 안 했으니깐 못 찾는 거지 라고 생각했고 오빠한테 많이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가자, 오빠가 나를 거꾸로 매달아도 물에 집어넣어 고문해도 버티자 라며 제 마음을 잘 달래왔습니다.
어머니 생신날 어머니는 저와 나란히 누워 엄마생일 선물로 신변보호요청서를 써달라고 하셨고 저는 그것만 쓰고 상담은 안 받겠다고 했지만 제가 하는 딜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랑 같이 누워있는 동안 그렇게 높아만 보였던 어머니가 나이가 많이 드신 걸 느꼈고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제사장이 돼서 어머니 호강 시켜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별 반응 없자 아버지가 오셨고 오시자마자 저를 붙잡고 막 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상하게 잘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고, 아버지께서 저를 6시간 넘게 진이 빠질 때 까지 설득을 하였습니다. 계속 말을 듣지 않자 아버지는 2시간이 넘게 방언기도 하셨고 저는 신천지 안에서 방언은 귀신이 준 거라고 배웠기에 아버지에 기도 소리가 너무 무서워 아버지 입을 틀어 막기도 하고 소리도 계속 질러 보았지만, 기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그랗게 앉아 가족예배를 드리는 것도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지쳐갈 때쯤에 전에 다니던 교회에 제 소문이 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교회 옮기면 장사도 망하고 자녀들이 이단에 빠진다고 했던 말을 이루게 해서 아버지 이름에 스크래치를 냈다는 것이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래 모략으로 전도할 수 없는 우리 가족을 한꺼번에 전도해 주시려고 하나 보다, 그래! 진짜 진리가 뭔지 보여주자!’ 생각하여 결국 듣겠다고 하였지만 신변보호서랑 상담종이를 쓰는게 너무 자존심이 상했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 신앙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쓰겠다고 했지만 계속 우는 제게 아버지는 널 위해 기도하는 신천지 사람들 많을꺼 아니냐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족 4명밖에 몰라 누가 이길 것 같아 하며 너의 하나님이 맞는다면 널 끝까지 지켜주실 거라고 타이르셨고 저는 속으로는 ‘펜션에서 도망친 사명자는 많이 봤지만, 개종교육을 듣고 이기고 나와 사명을 하는 사명자는 없었기에 이제 나라가 완성이 다 되어갈 때쯤이니 바람이 더 거세게 불 텐데 그러면 개종교육에 끌려갈 일이 더 많아지겠고 이기고 사명하는 사람도 많아야 하지 않나?’ 내가 그 사람이 되어야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ㅈ’자 하나 쓰고 울고 ‘ㅏ’자 쓰고 울고 그렇게 2시간 만에 종이를 써냈고 결국 간사님께서 오셨습니다. 저는 분명 개종 교육자가 오면 난리를 치고 미친 척 해서 절대 안 듣겠다고 약속했지만 차마 아버지 앞에서 만큼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착하고 예쁜 딸 인 줄만 아는 아빠에게 그런 모습을 차마 보여줄 수 없었기에 아버지 이름을 더럽히는 게 죄송해서 저는 그냥 가만히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교리를 가져다주시면 내가 모르는 거라 반박을 못 하는 거라고 신천지 증거자료를 보여줄 때는 신천지 안에서도 거짓 문서를 만드니깐 이것도 여기서 만든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게 이틀째가 되던 날 간사님은 갑자기 ♡국이 영상을 보시자며 1시간정도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이상하게 간사님이 사람으로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저 제 영을 죽이려 했던 나쁜 사람, 성령훼방을 하는 사람으로 느껴졌었는데 영상을 보고나니 이상하게 우리 엄마처럼 누군가에 어머니시겠구나 라고 느껴졌고 잠이 오던 정신은 점점 말똥말똥해지며 밤을 새서 간사님 반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깨지기 시작했고 깨지면서도 거기가 맞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 사람들은 제가 찾던 신앙인들이 너무 나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입에 항상 하나님이야기밖에 안하던 구역원들이 너무 보고 싶었고 미안했습니다. 아직도 신천지에 갔다 온 게 꼭 긴 꿈을 꾼 것 같았습니다.
신천지를 나온 초반에는 감사가 나오지 않고 화가 나고 원망이 들었습니다. 회개도 감사함도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거기 있는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요….’라며 매일 밤마다 혼자 울었습니다.
또 후속 교육을 들으면 들을수록 모든 걸 회피하고 싶었습니다. 도망가 버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구원관이 없어서 믿음이 적어서 내 마음대로 신앙해서 신천지에 간거 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기성교회 간사님이 제게 너 왜 신천지에 갔니?'라고 물어보면 당신들이 정죄하고 판단하고 안 가르쳐 주었잖아요. 목사님이 물어보시면 목사님의 행실이 참된 것 같으세요? 가족 뭐라고 하면 우리 가족 주일예배 안 지켰잖아 가족들 신앙 잘하라고 나 보낸 거야 라고 변명하고 싶었고 그렇게 제 마음을, 제 자신을 감싸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후속 교육으로 점점 회복되어갈수록 하루하루가 너무 감사하고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러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는구나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하나님 곁을 떠나려고 해도 절대 놓지 않아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울 만도 한데 이렇게 다시 하나님 곁으로 오게 하심을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또 왜 신천지를 통해야만 했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하는 모든 말씀이 다 제게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제 생각의 틀에 하나님을 맞추려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멀어질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아래 하나님의 선을 믿고 나아가겠습니다. 신천지에 다녀온 것을 원망도 후회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곳에서 많은걸 경험한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떠한 힘듦이 있어도 제멋대로 생각하지 않고 발돋움으로 삼아 나아가겠습니다. 논리를 좇아 진리를 부인하지도 않겠습니다. 예전처럼 감정신앙만이 아닌, 신천지에서의 행위신앙만도 아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걸음씩 나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곳이 참인 줄 알고 이단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돌이켜 품어 줄 기독교를 기대하며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로 나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