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피연 마태지파 대표 이♡선 신천지 탈출기

안녕하세요 저는 신천지 마태지파 107-1기 졸업생 이*선입니다.

@신천지 가기 전 생활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녔고 열심히 교회다니고 기도하는 모습에 주위에서 믿음이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청년부 임원을 하게되면서 성도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는 목회자분들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에 불신과 봉사의 회의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개설해 준 성경공부를 했지만 성경은 여전히 어려웠고 교회에 대한 실망감은 커졌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러한 교회에 봉사로 너무 열심이고 헌신적이셨습니다. 이렇게 반발심이 있던 시기에 이러한 제 부정적인 마음을 약점으로 신천지는 저에게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신천지 가게 된 동기
신천지를 가게 된 것은, 대학교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 친한 대학교 동아리 동기로부터 소개를 받았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대학교 생활동안에 가장 친했던 친구였는데 2학년 때 부터인가 학교를 자퇴하고 신학교로 진학을 해서 전도사님을 하겠다고 했었습니다. 사실 그 친구는 대학교 때 이미 부모님을 따라 신천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 친구는 시몬지파 화정교회 였습니다. 

저는 대학원에 진학하고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하던 중 제가 먼저 그 친구에게 연락해서 그동안의 신앙적인 걱정 고민을 털어놓았고 그 친구는 자기가 양육 받았던 전도사님을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외국에 계신다던 전도사님은 마침 비슷한 시기에 입국하셔서 인천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고, 엄청난 운명같은 타이밍으로 저와 만나게 되어 주4회 복음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2회 복음방을 마치고 센터를 들어가서 2012년 6월에 입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천지에서 생활
 저는 센터 생활동안 믿음이 크게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적당히 해서 흰무리라도 되면 그것도 좋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전도사님과 강사님들은 저를 걱정했습니다. 입교를 해서 청년부에서 하는 활동도 처음에는 귀찮고 하기싫었지만 친한 언니들과 동생들이 생기고 맨날 만나고 놀면서 구역 생활에 재미가 붙기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 열심히 했는지 모르게 언제부턴가 팀장을 하게 됐고 나이도 있고 돈도 벌고 있으니 구역장도 어렵지 않게 시작했습니다. 땡볕에서 노방하고 다니는 것이 힘들고 지쳐서 바로 교사교육을 듣고 복음방교사가 되었습니다. 맨날 실적 때문에 혼나는 것은 싫었지만 저를 믿고 따라주는 구역원들과 특별히 아껴주는 부장님들과 지내는 생활은 유쾌하고 재밌었습니다.

세상 돈걱정도 필요없고 진로걱정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같은 세상 고민들이 없는 신천지는 정말 청년들에게 천국이었습니다. 이 천국은 제게 길게 가지는 않았습니다. 제 허술함과 엄마의 촉으로 일찌감치 가족들에게 제가 신천지 다니는 것이 드러나게 됐습니다.

@핍박의 시작
 오래되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하루는 복음방수업 중에 쪽지시험을 보았는데 수업 후에 그 시험지를 가방에 두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그 가방을 집에 두고 왔고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인천교회에서 오전모임을 하고 있는데 놀란 목소리로 엄마한테 전화가 온 것입니다. 가방에서 나온 쪽지를 보고 신천지냐며.. 저는 아니라고 잡아뗐습니다. 그냥 홍보지 받은거라고 저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저는 부모님께서 제 말을 믿어줄 줄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좋은 마음으로 전도하러 나가던 중 이번엔 아빠한테 전화를 받았습니다. 지금 학교에 와 있다고 어디냐고. 그날 그렇게 크게 걸린 후에 저는 신천지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일로 부모님은 저를 교회 담임목사님께 데려갔고 좋은 말씀과 안수를 받고 생각보다 쉽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후로도 계속 신천지에 나갔습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고 계속해서 엄청나게 많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에니어 7,9번이었습니다. 매우 초 긍정적인 마인드로 어렵지만 힘들지는 않게 꾸역꾸역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신천지 신앙의 꽃은 핍박이니까요.
 2013년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준비한다며 노량진에 방을 얻어 나갔습니다. 아직도 신기한 것은 생활비벌고 등록금 벌며 신천지 구역장과 교사 생활을 병행하며 논문까지 무사히 쓰고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지금 생각해보면 기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때도 구역장을 하며 신나게 신천지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부모님이 갑자기 고시원에 들어닥치는 바람에 이번에는 제대로 걸려 각종 교사노트와 전도프린트물 신천지도서와 인증카드까지 걸리고 집으로 소환되었습니다. 자유를 잃고 집에 갇혀있으면서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고, 집 밖에 나갈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직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면서 이 비참한 생활을 끝내고 독일로 도망갈 생각도 했습니다. 부모님께는 모두 정리하고 독일로 여행다녀온다고 하고 완전 범죄를 꿈꿨지만, 하나님께서 제 길을 막으시고 부모님께 제 계획이 담긴 핸드폰 메세지를 보이셨습니다. 그날 한바탕 난리가 난 뒤에야 저는 모든 걸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안되겠다 싶었던 저는 부모님께 신천지에서 예배 드리겠다고 선언했고, 부모님께서 못이기는 척 예배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신천지로 몇 주동안 떳떳하게 다녔습니다. 

부모님이 쿨하게 제 신앙을 인정해 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4년 3월 어느날. 저는 친구들과 금요일 밤에 늦게까지 놀고 들어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수차례 전화를 하며 언제올꺼냐고 닦달했지만 그날따라 목소리가 매우 차분하고 인자해서 그냥 아주아주 늦게까지 놀다 들어갔습니다. 집 앞에 서 있던 아빠는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며 지금 가야한다고 저를 급하게 차에 태웠는데 그 차엔 이미 엄마와 오빠가 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내릴 순 없어서 가는 길 내내 표지판을 보며 어디로 가는지 보았습니다.

도착한 곳은 어느 펜션 2층. 저는 다음날 직장을 가야한다며 난리난리를 쳤고, 엄마는 아무도 전화가 없으니 아래 펜션관리자에게 빌려서 전화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엄마가 그 펜션 관리인에게 갈 때마다 작은 핸드백을 엄청 열심히 챙겨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토요일저녁 저는 별 생각없이 세상 편하게 자고 일어나 티비를 보고있는데 부모님이 모두 동시에 주무시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군. 저는 이때다 싶어서 어디 S.O.S 메모를 쓸 종이를 찾기위해 여기저기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코트 뒤에 숨겨진 그 작은 핸드백. 그 안에는 대포폰으로 추정되는 핸드폰이 있었습니다. 핸드폰을 가지고 일단 화장실에 갔습니다. 화장실에는 더 애쓸것없이 수건에 펜션이름이 인쇄되어 걸려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렵지않게 112에 문자로 신고를 했고 신천지에도 문자를 보냈습니다. 몇시간 뒤 신천지보다 경찰이 먼저 왔고 저는 안전하게 경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신천지에서 작은 이긴자가 되었고 부모님은 바로 시위를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핍박다운 핍박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시위하시는 부모님을 둔 덕에 저는 전도활동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센터에 출입하는 모습을 보면 부모님의 시위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 이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몰래 다녔습니다. 이렇게 살아 무엇하나 할 정도로 신천지인으로서 너무 힘든 생활이었습니다.

@신천지를 나오게 된 과정

부모님의 시위가 점점 더 거세지자 더 이상 견딜수 없었던 마태지파에서 내어놓은 대책은 각서였습니다. 4월에 신천지와 저와 부모님은 삼자대면을 했습니다. 부모님의 입장은 신천지에서 저를 데려갔으니 너네가 *선이를 개종교육 장소로 데려다놓아라. 신천지입장은 *선이를 제명시키고 개종교육에도 보내도록 하겠다. 제 입장은 단, 제 직장 후임자가 구해질 때까지 기다려달라. 시간을 벌어보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세 입장의 내용으로 작성한 각서에 모두 사인을 했고, 신천지 섭외부장 신학부장이 자리를 뜨자 부모님은 돌변해서 저에게 바로 구리 초대교회로 상담을 가자며 차에 태웠습니다. 무서워진 저는 바로 자리를 피해 출근복장 그대로 도망갔습니다. 그날 직장에서도 짤리고 갈 데가 없어진 저는 신천지에 있던 큰 이모에게 연락해서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큰이모가 신천지라는 것은 이전부터 심증은 있었지만 노량진 사건 이후로 직접 연락이 닿아서 확실하게 알게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이모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자리잡았고 마태지파에서는 저에 대한 관리가 가끔 한두달에 한번씩 마플오는 정도로 끊기게 되었습니다. 사실 마태지파 입장에서는 부모님의 시위로 인해 많은 피해를 받아 안타깝긴 하지만 제가 마태로 돌아오지 않길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이들 아시다시피 제가 세상사람을 만나 남자친구로 사귀게 되면서 신천지와는 몸도 마음도 많이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있으나 지금 핍박으로 인해 신앙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까 나중에라도 돌아가서 신앙을 해야겠다. 여러 가지 마음이 들었을 것이지만 세상 일을 하며 신앙지키기는 쉽지않았습니다.

그렇게 여러달을 보내고 9월달 즈음, 당시 요한지파 청년 섭외부장이었던 박**부장을 만났습니다. 제 상황을 안쓰럽게 보며 신천지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고 여러 자료들을 챙겨주고 요한으로 예배 출석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마태에서가 아닌 박상인부장에게 관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태에서는 제가 숨어지내기를 바랬지만 다시금 신앙이 살아났던 저는 그렇게 신앙하기 싫다며 요한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박**부장이 요한지파 총무가 되며 강피연이 다시 개설되었고 저를 총회로 불러 강피연 마태 대표를 하도록 했습니다. 저로썬 영광중 영광으로 강피연에 다른 언니들과 정말 밤낮 고민하고 준비하며 새로이 터를 닦았습니다.

강제개종피해자연대, 강피연은 신천지에서 섭외부와 협력해서 신천지에 힘을 실어주도록 만든 단체로서, 언론에 인권문제 등 여러 가지로 이단 상담소를 무너뜨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도 각 언론들에게 강피연에서 한 기자회견 내용들과 피해자들의 사례집을 보내며 홍보하는 일을 했습니다. 

3월부터 이제 막 강피연 일 좀 슬슬 시작해볼까 하던 5월 말. 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경호원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진심어린 설득으로 인해 공기좋은 펜션으로 가게되었고 그 장소에서 저는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정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 생각한 것이 저는 언제나 특A급 핍박자라서 항상 마태섭외부장에게 1:1 특별관리를 받았습니다. 부모님을 만날 땐 미리 허락을 받고 약속을 정하고 장소와 시간을 공유하고 그 시간부터 초 긴장상태로 매시간 마다 안전확인 문자를 보내야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있기 그 전 주에 섭외부장이 저에게 부모님께서 심하게 시위한다고 막 뭐라해서 마상, 마음에 상처받은  저는 며칠동안 섭외부장과 보고도 안하고 연락도 안하고 막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스스로 부모님과 안부전화 하던 중에 저녁약속을 잡았던 것이었고 사건 당일 날에도 강피연 장*영대표에게만 얘기하고 나왔습니다. 만약 미리 섭외부장에게 얘기했다면 제 뒤를 밟았을 수도 있고 제가 대포폰을 준비해왔을 수도 있고 위치 추적장치를 가지고 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차를 타고 경호원들과 나란히 가면서도 그냥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발버둥도 치지않고 톨게이트를 지날 때 소리라도 칠 수 있었지만 전혀 그런것 없이 조용히 교육장소까지 왔습니다.

교육을 듣기위해 동의서를 쓸 때도 오래 고민하지않고 언젠가는 이 교육을 들어야 시위든 핍박이든 끝이 나겠지. 싸워 이기자 하는 마음으로 하고 교육을 들었습니다. 매일밤 에베소서 6장 전신갑주 기도를 하며 싸울 준비를 했지만 며칠 동영상 몇 개만 보고도 “아 이거 아닐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영상 며칠 보고 간사님 오기 전에 광주에 사는 동*가 와서 얘기해주는데, 교리적인 건 별로 귀에 안들어왔어요. 근데 나도 곧 저렇게 되겠구나 신천지가 아닌가보다하는 생각이 들어 무섭기도 하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간사님이 오시기 전에 깨지고 신간사님께서 오셔서 실상반증과 이단의 계보를 해주시며 마음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회심 이후의 생활
회심을 한 이후 후속교육을 들으며 지금까지 3개월 넘게 저는 제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제 욕심을 쫓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회개하며 재활신앙을 했습니다. 아직 온전하진 않지만 제대로 신앙하기 위해 조금씩 하나님께 다가가는 제가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3년 반 긴 세월동안 무릎꿇고 긴장하는 생활을 하며 망가진 몸도 회복하고, 또 제가 절대 진리라고 자부했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저의 확신에 대한 실망한 마음도 차츰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 나와서는 신천지보다 그전까지 만났던 그 남자친구를 잊는게 가장 힘들었지만 우리집 강아지 두부가 애교로 자기 밥값을 톡톡히 해준 덕에 두부 보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못다녔던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면서 제가 너무 작은 세상을 살았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고 요즘에는 넉넉한 마음을 갖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하나하나 신천지 밖의 일상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우선 감사드리고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교육해주시고 기도해주신 수많은 초대교회 분들 모두 너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어디에서나 빛이 되고 본이 되는 삶으로 세상에 베풀며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