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00입니다. 저는 신천지 요한지파 과천교회에 소속되어 2012년10월부터 2015년 4월달까지(2012년 5월 신림센터) 3년 넘게 신천지 활동을 하였습니다.
저는 30살까지 교회를 고등학교 선생님을 따라서 친구랑 딱 한번의 경험을 가진 무신앙이었고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신천지에 들어가게 이유는 같은 과에 친했던 언니를 통해서 전도되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잠시 이야기하면 24살 대학교 졸업 후 5년정도 인테리어설계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15개월 캐나다를 다녀온 후 31살이 되었던 저는 장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직장생활하면서 인맥, 학벌에 대한 스트레스, 과도한 업무량, 믿었던 직장동료에 대한 성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때에 2년 정도 연락이 끊였던 언니한테 연락이 왔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서로 나누면서 언니가 자신이 전공을 바꿔 심리상담가라고 하면서 적성검사와 심리상담을 권했고 그때부터 복음방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캐나다 가기 전에 전도하려고 엄마한테 연락을 했는데 벌써 비행기를 탔다고 해서 2년후에 전도가 되었고 만나기 2년전에 아직 말할 수는 없지만 전공을 바꿔 대학원을 간다고 해서 상담가라고 했을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 분들이 있으시겠죠?! 신을 믿지 않았던 ‘무신앙이 어떻게 성경을 공부했을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까?’ 이시겠죠. 첫 번째는 언니의 변한 모습이었습니다. 대학교 4년내내 전액장학금, 인생의 성공 목적을 두고 항상 동기들보다 앞서가고 부지런히 열심히 사는 언니였지만 경쟁에서 스트레스 받고 불안하고 비밀이 많던 사람이 2년만에 만나니 너무나 여유로워지고 배려하고 다른 사람 인생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모습에 궁금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이유가 무엇인지? 당연히 이유가 성경이었지요. 언니도 무신앙에서 시작해서 처음부터 부담은 주지 않았습니다. 종교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세계 베스트셀러고 인생에서 한번쯤은 꼭 접해봐야 한다. 그래야 자아완성이 되고 미래에 대한 비젼을 찾을 수 있다고 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워낙 기독교인들이 신천지 경계가 심해서 무신앙을 타겟으로 전도를 많이 하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무신앙 복음방교재가 따로 만들어져 적극적으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신이신 하나님이 존재함을 느끼므로 믿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므로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이 있다면 이럴 수 없다고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되며, 처음 만난 하나님, 예수님은 앞뒤 설명없이 믿지 않으면 천벌받는다 지옥간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에 의해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또한 친한 친구가 이단에 빠진 부모로부터 도망나와 힘들어 하는 모습은 더욱 무신론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배우면서 소설이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라는 것에 신기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학교에서 배운 지식, 세계사, 자기개발서의 좋은 명언들이 여기에 다 있는 것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 정통교리와 비교할 수가 없었고 의심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엄청 잘 받아들였죠.
정말 내가 앞으로 살 날이 많은데 6개월 투자할 만하다고 해서 신림센터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전 해보지 않았던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너무나 낯설고 어색했지만 정말 힘든 일이 생기니 너무나 간절해지더라고요. 제가 신천지에 빠진 일이 터지기 전에 우리 가족이 무척이나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정말 동생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매일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정말 보호해달라고, 힘든 시기 이겨낼 수 있게 지혜 허락해 달라고, 분명 하나님이 함께하니 끝은 해피앤딩이니 중간과정 잘 이겨낼 수 있게 이끌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저희 가족들이 잘 해내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신천지 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천지 생활했을 때의 일이고 잘못된 교리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이 기도만큼은 이만희보다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믿게 하시려고 들어주신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31살~34살의 3년간의 신천지 생활을 간략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크게 1년은 신앙생활적응, 1년은 복음방교사하면서 관리인, 잎사귀, 1년은 구역장 사역을 했습니다.
신앙생활 1년은 무신앙이고 낯가림을 하니 요구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 예배만 빠지지 않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만희 외적인 모습, 박수치면서 노래부르는 모습이 북한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내가 가진 고정관념이라 생각하고 성경대로 이루어진 곳이니 맞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신29년) 6회 체전과 2014년(신31년) 만국회의 잠실올림픽경기장의 보여지는 모습들은 확신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렇게 큰 행사를 언론에 보도하지 않는 세상이 부패했고 사단이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반에 적응이 된 후에 2년째 되니 점점 전도의 압박이 있었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복받고 영생하는데 주변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친구들 뿐이었습니다. 전도를 하고 싶어도 다들 결혼을 했거나 앞둔 친구들이라 신천지에서 말하는 성경공부 할 환경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동생, 남동생 시도는 해봤지만 잘 씨알도 안 먹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다행입니다. 아는 지인이 없으니 지하철, 서점 노방 전도를 해야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요한지파과천 특전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특전대는 직장생활을 하면 들어갈 수가 없는데 총회장 명으로 요한지파는 1인 2명을 전도하라는 압박이 있으니 교회사명자들이 열매맺는데에 혈안이 되었기 때문에 요한지파특전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많이 울었어요. 예전에 나는 낯선 사람들이 말시키면 찬바람이 일고 한심하게 보았던 경험이 있는데 내가 그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에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또한 하루에 미션이 있는데 3명이상 번호따기, 정보파악하기, 길거리에서 스피치하기등 미션이 있었고 하지 못할 경우에는 체력훈련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전도가 잘되면 좋은데, 복음방이나 센터에서 떨어지는 마음도, 몸도 지쳐있었습니다.
매일이 새벽 6시반에 교육 모임하고 9시부터 6시까지 직장생활하면서 점심시간에 복음방 아니면 노방을 했습니다. 퇴근 후에 복음방 교육하고 나면 저녁9시~10시, 10시 이후에는 구역원들 만나서 힘든 것 있으면 상담해주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12시가 넘을 때가 허다했습니다. 생활이 이렇다 보니 직장생활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고 구역원 관리가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신앙생활 얼마 하지도 않았음에도 나이가 좀 있다보니 맡은 구역원들이 평범한 가정이 없었고 예배 안나오면 집에 찾아가야 했고 이성문제부터 시작해서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보니 가족들과 연락이 뜸하게 되고 집에 내려가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부모님은 타지에서 일하느냐고 바쁘고 힘들까봐 집에 오라는 이야기도 안하셨습니다.
제가 00언니와 교회다니는 것을 이야기 했을 때 별로 반가워는 안하셨지만 종교에 자유가 있다고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에서 말씀드리지만 엄마가 했던 말씀 중에 크게 2가지가 아직도 생각이 나요.
첫 번째가 ‘너 서운하다고’, 두 번째가 ‘너 이단에 빠진 건 아니지?’입니다. 제가 신천지에 가기 전에는 엄마한테 친구, 직장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습니다. 신천지 생활을 숨겨야하니 할 이야기가 점점 없어졌는데, 엄마는 이걸 느끼고 계신 거였어요. 어느 한 날은 ‘서운하고 너도 변했다고 왜 니 이야기를 예전에 잘했었는데 지금은 왜 안하냐고?’ 하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도 내가 조금만 고생하면 144000명에 들어가서 엄마, 아빠, 동생들이랑 복받으면서 영생할 수 있다고 위안하면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모님이 무신앙이시니 이단은 잘 모르실꺼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이상한데 가지말고 교회 잘 골라서 가라고 했을 때 좀 놀랐습니다.
이제부터 회심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피곤한 생활이 반복되고 홍천 집에 안 간지도 설날이후 거의 3달째였습니다(신천지 빠지기 전에는 한 달에 1번은 갔던 것 같아요. 집에 자주 내려간다고 쓴소리 들은 적도 있어요). 너무 힘들다 보니 엄마와 가족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때가 정말 정절으로 지쳐있었습니다. 엄마한테 문자로 ‘엄마 보고싶다’ 라고 보냈더니 그러면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 날이 4월24일 금요일이었습니다. 근데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토요일에는 전도장이라고 해서 숭실대나 작은 음악회 콘서트 준비해야했고, 그 이후에는 구역원 전도할 사람, 우연만남이 계획되었었습니다. 일요일은 오전 9시부터 밤10시까지 예배, 사명자모임이 있어서 도저히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그냥 마음이 안갔다가오면 안되겠는거예요. 토요일 아침일찍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홍천에 내려갔습니다.
이 순간이 나를 살려 준 것 같아요. 그래서 가족과 함께 맛있게 식사를 하고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다. 자려고 누웠는데 구역원 한명이 힘들다는 마플과 복음방을 진행 중이던 남자아이가 연락이 안돼서 불안한 마음으로 잤고 새벽에 구역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가족들은 옆에서 자고 있지, 위로는 해야지, 윗사명자한테 보고하고 빨리 움직여야하는데 새벽에 나갈 수는 없는 상황까지 생각나요.
그러고 나서 눈 떠보니 중환자실이었습니다. 그날이 4월26일 일요일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4월25일 토요일 아침에 친구 전화 받다가 쓰러졌다고 하더라고요. 그 하루가 생각나지 않아요. 그냥 음성 몇 개만 흐릿하게 생각이 납니다. 제 정신이 들었을 때 든 생각은 ‘예배 못 갔네, 연락해줘야지, 내 가방은 잘있나?’ (출입명찰이 있었거든요) 조금 걱정은 했지만 부모님이 모를꺼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우리 가족은 무신앙이라서요.
근데 가족들의 행동이 조금씩 이상했습니다. 엄마한테 핸드폰을 달라고 하니까 계속 핑계되면서 안주시고, 다시 캐나다 가서 결혼하고 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거기 의사 한명이 종교가 뭐냐고 아픈 사람한테 유도 질문을 하는 거예요. 끝까지 그냥 교회 다닌다고 하고, 정신과 의사가 와서 진찰해서 머리가 다쳐서 모든 검사를 다하는 구나 생각했지 가족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쉬운 비밀번호가 설정된 휴대폰과 신천지 출입 카드 뒤 이만희 할아버지 사진은 가족들이 알 수 밖에 없었고 이단에 대해서 모른 저희 가족들은 인터넷과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을 통해서 심각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원입원 사흘만에 퇴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집으로 안가고 부모님이 가게에 들리셨고 저는 잠시 누워있는데 신천지관리부장이 우리 가게 앞에서 딸기를 사길래 벌떡 일어났습니다. 학교 선배로 아는 척을 하려고 했는데 눈치를 주면서 딸기만 사가지고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께는 밖에 있는 공용화장실을 갔다 온다고 하고 나갔는데 그 화장실 앞에 서있는거예요.
말을 걸을 려고 하는데 외숙모와 부모님이 빨리 오라고 드라이브 하러 가자고 손짓을 하길래 말도 못 걸고 차에 탔고 나 피곤하니까 집에 가자고 했는데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이때부터 부모님이 아셨구나 생각은 했지만 자세히는 모르실꺼라고 생각은 하면서 불안하니까 차에서 큰소리가 오갔습니다. 근데 개종교육 받은 거랑은 다르게 산 속의 펜션이 아니라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개종교육은 아닌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도망갈 수 있었는데 설마하는 마음에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거기가 바로 권사님의 집이였습니다. 집 문을 여는데 동생들이 있었고 모르는 할머니가 계시는데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과 집에 가겠다고 싸우고 권사님께 큰소리 치는데 신00간사님이 검정색 케리어와 남자 장로님 한 분하고 들어오시는 데 그 모습이 무서웠으며 순간 스치는 생각이 ‘큰일났다. 우리 집이 개종교육, 신뱀 때문에 망하겠구나. 없는 살림에 뱀들한테 돈 주고, 동생들이 힘들게 구한 직장도 못나게 해서 우리가족 풍진박살나게 하겠구나’ 라는 생각하니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아빠한테 신천지 안 나갈 테니 그냥 집에 가자고 나 홍천에 내려와서 아빠랑 살겠다고 울고 집에 가자고 매달렸습니다. 계속 얼마 돈 줬냐고 분명 나중에 돈을 요구한다고 아빠를 계속 설득하는데 동생들이 너무 철처하게 교육을 받아서 막았습니다. 신간사님과 권사님께 얼마나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는지 모릅니다. 가면도 썼다가 밤에 도망도 갔다가 별의 별 짓을 하는데도 가족들이 더욱 완강해지는 모습에 뱀 사단이 가족인생을 망치겠다는 생각에 들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또한 신간사님의 지구력과 인내심에 마음이 조금씩 열렸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나를 죽이려는구나, 병원에서 퇴원한지 얼마되지도 않는데’ 생각과 ‘우리엄마 피같은 돈을 얼마나 돈을 요구했을까? ’하면서 얼마나 공격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집에 가실 것 같으시면서도 안가시고 반증하시고, 몇 날을 저와 함께 자면서 밖을 한번도 안나가시고 한결같은 모습이 저를 조금씩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간사님이 쉬시면 권사님이 오셔서 돌아가신 할아버지 말씀하시면서 설득하셨습니다. 남동생은 나를 설득해 보겠다고 옆에서 종이와 펜을 가지고 간증을 같이 듣겠다고 하고, 여동생은 발목이 다치고, 부모님은 점점 안색이 안좋아 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중 이단계보에서 깨졌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저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해주신 권사님,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해주신 간사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준 부모님, 동생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4월말부터 7월까지 3개월은 저희 가족에게는 잊을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셨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낍니다.
아직도 신천지에 있었다면 마지막 가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못봤을 것이고 서울대입구에 살던 저는 메스르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고 끝까지 신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30살까지 교회를 고등학교 선생님을 따라서 친구랑 딱 한번의 경험을 가진 무신앙이었고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신천지에 들어가게 이유는 같은 과에 친했던 언니를 통해서 전도되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잠시 이야기하면 24살 대학교 졸업 후 5년정도 인테리어설계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15개월 캐나다를 다녀온 후 31살이 되었던 저는 장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직장생활하면서 인맥, 학벌에 대한 스트레스, 과도한 업무량, 믿었던 직장동료에 대한 성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때에 2년 정도 연락이 끊였던 언니한테 연락이 왔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서로 나누면서 언니가 자신이 전공을 바꿔 심리상담가라고 하면서 적성검사와 심리상담을 권했고 그때부터 복음방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캐나다 가기 전에 전도하려고 엄마한테 연락을 했는데 벌써 비행기를 탔다고 해서 2년후에 전도가 되었고 만나기 2년전에 아직 말할 수는 없지만 전공을 바꿔 대학원을 간다고 해서 상담가라고 했을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 분들이 있으시겠죠?! 신을 믿지 않았던 ‘무신앙이 어떻게 성경을 공부했을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까?’ 이시겠죠. 첫 번째는 언니의 변한 모습이었습니다. 대학교 4년내내 전액장학금, 인생의 성공 목적을 두고 항상 동기들보다 앞서가고 부지런히 열심히 사는 언니였지만 경쟁에서 스트레스 받고 불안하고 비밀이 많던 사람이 2년만에 만나니 너무나 여유로워지고 배려하고 다른 사람 인생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모습에 궁금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이유가 무엇인지? 당연히 이유가 성경이었지요. 언니도 무신앙에서 시작해서 처음부터 부담은 주지 않았습니다. 종교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세계 베스트셀러고 인생에서 한번쯤은 꼭 접해봐야 한다. 그래야 자아완성이 되고 미래에 대한 비젼을 찾을 수 있다고 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워낙 기독교인들이 신천지 경계가 심해서 무신앙을 타겟으로 전도를 많이 하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무신앙 복음방교재가 따로 만들어져 적극적으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신이신 하나님이 존재함을 느끼므로 믿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므로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이 있다면 이럴 수 없다고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되며, 처음 만난 하나님, 예수님은 앞뒤 설명없이 믿지 않으면 천벌받는다 지옥간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에 의해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또한 친한 친구가 이단에 빠진 부모로부터 도망나와 힘들어 하는 모습은 더욱 무신론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배우면서 소설이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라는 것에 신기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학교에서 배운 지식, 세계사, 자기개발서의 좋은 명언들이 여기에 다 있는 것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 정통교리와 비교할 수가 없었고 의심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엄청 잘 받아들였죠.
정말 내가 앞으로 살 날이 많은데 6개월 투자할 만하다고 해서 신림센터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전 해보지 않았던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너무나 낯설고 어색했지만 정말 힘든 일이 생기니 너무나 간절해지더라고요. 제가 신천지에 빠진 일이 터지기 전에 우리 가족이 무척이나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정말 동생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매일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정말 보호해달라고, 힘든 시기 이겨낼 수 있게 지혜 허락해 달라고, 분명 하나님이 함께하니 끝은 해피앤딩이니 중간과정 잘 이겨낼 수 있게 이끌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저희 가족들이 잘 해내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신천지 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천지 생활했을 때의 일이고 잘못된 교리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이 기도만큼은 이만희보다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믿게 하시려고 들어주신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31살~34살의 3년간의 신천지 생활을 간략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크게 1년은 신앙생활적응, 1년은 복음방교사하면서 관리인, 잎사귀, 1년은 구역장 사역을 했습니다.
신앙생활 1년은 무신앙이고 낯가림을 하니 요구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 예배만 빠지지 않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만희 외적인 모습, 박수치면서 노래부르는 모습이 북한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내가 가진 고정관념이라 생각하고 성경대로 이루어진 곳이니 맞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신29년) 6회 체전과 2014년(신31년) 만국회의 잠실올림픽경기장의 보여지는 모습들은 확신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렇게 큰 행사를 언론에 보도하지 않는 세상이 부패했고 사단이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반에 적응이 된 후에 2년째 되니 점점 전도의 압박이 있었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복받고 영생하는데 주변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친구들 뿐이었습니다. 전도를 하고 싶어도 다들 결혼을 했거나 앞둔 친구들이라 신천지에서 말하는 성경공부 할 환경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동생, 남동생 시도는 해봤지만 잘 씨알도 안 먹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다행입니다. 아는 지인이 없으니 지하철, 서점 노방 전도를 해야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요한지파과천 특전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특전대는 직장생활을 하면 들어갈 수가 없는데 총회장 명으로 요한지파는 1인 2명을 전도하라는 압박이 있으니 교회사명자들이 열매맺는데에 혈안이 되었기 때문에 요한지파특전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많이 울었어요. 예전에 나는 낯선 사람들이 말시키면 찬바람이 일고 한심하게 보았던 경험이 있는데 내가 그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에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또한 하루에 미션이 있는데 3명이상 번호따기, 정보파악하기, 길거리에서 스피치하기등 미션이 있었고 하지 못할 경우에는 체력훈련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전도가 잘되면 좋은데, 복음방이나 센터에서 떨어지는 마음도, 몸도 지쳐있었습니다.
매일이 새벽 6시반에 교육 모임하고 9시부터 6시까지 직장생활하면서 점심시간에 복음방 아니면 노방을 했습니다. 퇴근 후에 복음방 교육하고 나면 저녁9시~10시, 10시 이후에는 구역원들 만나서 힘든 것 있으면 상담해주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12시가 넘을 때가 허다했습니다. 생활이 이렇다 보니 직장생활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고 구역원 관리가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신앙생활 얼마 하지도 않았음에도 나이가 좀 있다보니 맡은 구역원들이 평범한 가정이 없었고 예배 안나오면 집에 찾아가야 했고 이성문제부터 시작해서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보니 가족들과 연락이 뜸하게 되고 집에 내려가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부모님은 타지에서 일하느냐고 바쁘고 힘들까봐 집에 오라는 이야기도 안하셨습니다.
제가 00언니와 교회다니는 것을 이야기 했을 때 별로 반가워는 안하셨지만 종교에 자유가 있다고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에서 말씀드리지만 엄마가 했던 말씀 중에 크게 2가지가 아직도 생각이 나요.
첫 번째가 ‘너 서운하다고’, 두 번째가 ‘너 이단에 빠진 건 아니지?’입니다. 제가 신천지에 가기 전에는 엄마한테 친구, 직장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습니다. 신천지 생활을 숨겨야하니 할 이야기가 점점 없어졌는데, 엄마는 이걸 느끼고 계신 거였어요. 어느 한 날은 ‘서운하고 너도 변했다고 왜 니 이야기를 예전에 잘했었는데 지금은 왜 안하냐고?’ 하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도 내가 조금만 고생하면 144000명에 들어가서 엄마, 아빠, 동생들이랑 복받으면서 영생할 수 있다고 위안하면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모님이 무신앙이시니 이단은 잘 모르실꺼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이상한데 가지말고 교회 잘 골라서 가라고 했을 때 좀 놀랐습니다.
이제부터 회심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피곤한 생활이 반복되고 홍천 집에 안 간지도 설날이후 거의 3달째였습니다(신천지 빠지기 전에는 한 달에 1번은 갔던 것 같아요. 집에 자주 내려간다고 쓴소리 들은 적도 있어요). 너무 힘들다 보니 엄마와 가족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때가 정말 정절으로 지쳐있었습니다. 엄마한테 문자로 ‘엄마 보고싶다’ 라고 보냈더니 그러면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 날이 4월24일 금요일이었습니다. 근데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토요일에는 전도장이라고 해서 숭실대나 작은 음악회 콘서트 준비해야했고, 그 이후에는 구역원 전도할 사람, 우연만남이 계획되었었습니다. 일요일은 오전 9시부터 밤10시까지 예배, 사명자모임이 있어서 도저히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그냥 마음이 안갔다가오면 안되겠는거예요. 토요일 아침일찍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홍천에 내려갔습니다.
이 순간이 나를 살려 준 것 같아요. 그래서 가족과 함께 맛있게 식사를 하고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다. 자려고 누웠는데 구역원 한명이 힘들다는 마플과 복음방을 진행 중이던 남자아이가 연락이 안돼서 불안한 마음으로 잤고 새벽에 구역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가족들은 옆에서 자고 있지, 위로는 해야지, 윗사명자한테 보고하고 빨리 움직여야하는데 새벽에 나갈 수는 없는 상황까지 생각나요.
그러고 나서 눈 떠보니 중환자실이었습니다. 그날이 4월26일 일요일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4월25일 토요일 아침에 친구 전화 받다가 쓰러졌다고 하더라고요. 그 하루가 생각나지 않아요. 그냥 음성 몇 개만 흐릿하게 생각이 납니다. 제 정신이 들었을 때 든 생각은 ‘예배 못 갔네, 연락해줘야지, 내 가방은 잘있나?’ (출입명찰이 있었거든요) 조금 걱정은 했지만 부모님이 모를꺼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우리 가족은 무신앙이라서요.
근데 가족들의 행동이 조금씩 이상했습니다. 엄마한테 핸드폰을 달라고 하니까 계속 핑계되면서 안주시고, 다시 캐나다 가서 결혼하고 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거기 의사 한명이 종교가 뭐냐고 아픈 사람한테 유도 질문을 하는 거예요. 끝까지 그냥 교회 다닌다고 하고, 정신과 의사가 와서 진찰해서 머리가 다쳐서 모든 검사를 다하는 구나 생각했지 가족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쉬운 비밀번호가 설정된 휴대폰과 신천지 출입 카드 뒤 이만희 할아버지 사진은 가족들이 알 수 밖에 없었고 이단에 대해서 모른 저희 가족들은 인터넷과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을 통해서 심각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원입원 사흘만에 퇴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집으로 안가고 부모님이 가게에 들리셨고 저는 잠시 누워있는데 신천지관리부장이 우리 가게 앞에서 딸기를 사길래 벌떡 일어났습니다. 학교 선배로 아는 척을 하려고 했는데 눈치를 주면서 딸기만 사가지고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께는 밖에 있는 공용화장실을 갔다 온다고 하고 나갔는데 그 화장실 앞에 서있는거예요.
말을 걸을 려고 하는데 외숙모와 부모님이 빨리 오라고 드라이브 하러 가자고 손짓을 하길래 말도 못 걸고 차에 탔고 나 피곤하니까 집에 가자고 했는데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이때부터 부모님이 아셨구나 생각은 했지만 자세히는 모르실꺼라고 생각은 하면서 불안하니까 차에서 큰소리가 오갔습니다. 근데 개종교육 받은 거랑은 다르게 산 속의 펜션이 아니라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개종교육은 아닌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도망갈 수 있었는데 설마하는 마음에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거기가 바로 권사님의 집이였습니다. 집 문을 여는데 동생들이 있었고 모르는 할머니가 계시는데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과 집에 가겠다고 싸우고 권사님께 큰소리 치는데 신00간사님이 검정색 케리어와 남자 장로님 한 분하고 들어오시는 데 그 모습이 무서웠으며 순간 스치는 생각이 ‘큰일났다. 우리 집이 개종교육, 신뱀 때문에 망하겠구나. 없는 살림에 뱀들한테 돈 주고, 동생들이 힘들게 구한 직장도 못나게 해서 우리가족 풍진박살나게 하겠구나’ 라는 생각하니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아빠한테 신천지 안 나갈 테니 그냥 집에 가자고 나 홍천에 내려와서 아빠랑 살겠다고 울고 집에 가자고 매달렸습니다. 계속 얼마 돈 줬냐고 분명 나중에 돈을 요구한다고 아빠를 계속 설득하는데 동생들이 너무 철처하게 교육을 받아서 막았습니다. 신간사님과 권사님께 얼마나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는지 모릅니다. 가면도 썼다가 밤에 도망도 갔다가 별의 별 짓을 하는데도 가족들이 더욱 완강해지는 모습에 뱀 사단이 가족인생을 망치겠다는 생각에 들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또한 신간사님의 지구력과 인내심에 마음이 조금씩 열렸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나를 죽이려는구나, 병원에서 퇴원한지 얼마되지도 않는데’ 생각과 ‘우리엄마 피같은 돈을 얼마나 돈을 요구했을까? ’하면서 얼마나 공격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집에 가실 것 같으시면서도 안가시고 반증하시고, 몇 날을 저와 함께 자면서 밖을 한번도 안나가시고 한결같은 모습이 저를 조금씩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간사님이 쉬시면 권사님이 오셔서 돌아가신 할아버지 말씀하시면서 설득하셨습니다. 남동생은 나를 설득해 보겠다고 옆에서 종이와 펜을 가지고 간증을 같이 듣겠다고 하고, 여동생은 발목이 다치고, 부모님은 점점 안색이 안좋아 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중 이단계보에서 깨졌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저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해주신 권사님,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해주신 간사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준 부모님, 동생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4월말부터 7월까지 3개월은 저희 가족에게는 잊을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셨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낍니다.
아직도 신천지에 있었다면 마지막 가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못봤을 것이고 서울대입구에 살던 저는 메스르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고 끝까지 신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