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수화 청년의 신천지생활 7년 (2) 신천지가 이단이라는 걸 알게 되었..

 
2. 신천지가 이단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나 이미 의심을 그만둔 나
 
2007년 겨울쯤, 어느 날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예배가 끝나고 나서 어김없이 광고가 시작되었다. 광고 시간만큼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글씨가 나오는 화면을 열심히 보게 된다. 그나마 못 듣는 내가 유일하게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번 광고에는 동영상이 나오는데 ‘PD수첩’에 관한 것이었다. MBC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이다. 신천지가 나왔다. 바로 신천지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신천지를 탈퇴한 사람들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전체 분량은 아니고 편집되어 나와서 짧게 끝났다. 이 동영상은 ‘이 방송 때문에 우리 신천지가 억울하게 핍박받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 “기성교회가 우릴 핍박하고 질투하니까 저렇게 방송으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서 우릴 방해하는 거야.”라고 하셨다. 나는 당시엔 정말 그런 줄로 믿게 되었다.
 
지금의 내가 보면 그런 내 자신이 참으로 신기하고도 무서웠다. 처음에 그렇게 의심하고 불편해했던 내가 PD수첩을 통해 신천지가 이단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이제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144,000명을 채우면 나라와 제사장이 되어 ‘영생’한다는 사실이 무척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느꼈었다. 분명히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신천지에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차츰 ‘영생’을 믿게 된 것이다. ‘제대로 믿고 성경공부 열심히 해서 깨달으면 내 모습이 완전히 다르게 변하고, 아픈 곳이 없어지며 영원히 산다’는 달콤한 유혹에 빠진 것이다.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으나 한편으론 은근히 ‘그것이 언젠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신천지에서 수시로 ‘초림 때 예수님이 이단으로 핍박 받았듯이 우리 신천지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고 핍박받고 있다. 하지만 핍박받을수록 나중에 더욱 더 큰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주장을 한다. 동영상이나 다음카페 ‘진짜바로알자 신천지’ 카페에 올라오는 글에서도 자주 나오는 주장이다. 그 내용이 너무나 그럴듯해서, 처음부터 경계하고 의심하던 나도 서서히 넘어간 것이 아닐까. 그렇게 점점 ‘신천지를 의심하지 말고 열심히 성경 공부하고 다녀야겠다! 부모님도 열심히 다니시니까’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2008년에는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제5회 신천지 하늘문화체전이 열렸다. 교회에서 여는 체육대회 치곤 꽤 규모가 크다고 느꼈다. 전국에서 각 버스를 타고 온 성도들이 줄을 서서 운동장으로 향하는 모습도 장관이었다. 마태지파도 새벽 일찍부터 버스를 타고 도착했다.
체전이 시작되기 1개월 전부터 미리 응원동작이나 춤을 연습한다. 주로 예배 끝나고 나서 몇 십 분간 연습을 했다. 마스 게임을 하는 사람은 평일에도 시간을 내서 연습하는 것 같았다. 각자 운동복, 모자, 장갑 등등을 자기가 비용을 부담해서 샀다. 또 별도로 체전용 비용을 걷었다.
 
다른 교회는 이런 것은 엄두도 못 낸다고 했을 때 괜히 신천지가 자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전국 12지파가 한 곳에 모인 그 모습은 굉장하다고 느꼈다. 특이한 건 지파마다 색깔이 달랐다. 초록색, 분홍색, 보라색, 하늘색, 연두색, 주황색, 노란색 등등…. 그래서 의자에 앉은 모든 신천지 성도들의 알록달록한 색깔이 돋보였다. 각 지파마다 색깔이 다른 이유가 하늘의 12보석의 열두 가지 색을 따왔다고 한다.
 
나는 청년회 쪽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사람들의 응원동작을 따라했다. 총회장의 연설이나 공연 빼고는 응원하느라 거의 앉아있지 못한 것 같았다. 특히 파도타기를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체육복 점퍼를 벗어서 옆에 있는 사람과 소매부분을 연결한 다음, 우리 차례가 오면 번쩍 드는 독특한 파도타기였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좀 지쳤다. 거기에 축구, 육상 등 스포츠대회가 시작되면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 다양한 응원도구를 들고 목이 터져라 응원해야 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먹을 때에야 한숨을 돌렸다. 힘들었지만 태권도, 무용, 마스게임 등 다양한 공연이 정말 멋지다고 느껴서 나름 재미있게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어머니는 부녀회 자리에서 응원을 하셨고, 아버지는 체전을 시작할 때 입장하는 기수단에 참여하셨다. 걸어갈 때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똑같이 팔을 흔들며 힘차게 입장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규칙적으로 발을 맞추면서 총회장 쪽을 향해 경례 자세를 취했다. 이게 쉬워보여도 100명 이상의 인원이 척척 동작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래서 아버지는 주말 때마다 예배 후 연습에 매진하셨다. 첫 번째 체전은 그렇게 힘들긴 했지만 그저 재미있다고 느꼈고, 더더욱 신천지에 대한 의심이 없어졌던 것 같다.
 
체전 후 시간이 흐르고 나서 구역 편성으로 새로운 구역장과 구역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있었던 구역에서만 했었던 구역소식지를 만들 때 내가 성경과 관련된 한자성어를 쓰는 일을 맡았다. 주일 예배를 드린 후에 시간이 나면 다 같이 밖에서 식사를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신기하리만큼 하나같이 친절하고 인성이 좋은 청년들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신천지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일 거란 잘못된 생각을 해버렸다. 숲은 안 보고 나무만 보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거기에다 부모님께서 다니시니까 부모님의 뜻에 거슬리면 안 된다는 무의식도 한 몫 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지 7년 동안이나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닐 수 있었다.
 
특히 부모님께서 신천지를 다니시면서 많이 한 활동 중 1위를 꼽으라면 전도라고 생각한다. 전도를 정말 왕성하게 하는 것을 가까이서 봐왔다. 부모님의 지인, 회사사람은 물론이고 가까운 친가, 외가 친척들에게도 전도하려고 애를 쓰셨다. 외가 쪽은 불교를 믿어서 전도하는 데 실패했지만 친가 쪽 고모에게 거의 전도에 성공할 뻔했다. 사촌들이 당시 신천지에 대해 알고 있어서 고모에게 다니지 말라고 반대해 흐지부지되어 부모님께서 아쉬워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도가 안 된 게 참으로 천만다행이다.
 
전도할 사람을 우리 집에 데려오는 것은 기본이요, 복음방 과정에 있는 사람을 데려와 거실에서 교육시키기도 했다. 가까운 거리에 사는 이웃들에게 전도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차츰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 80%는 거의 신천지 사람들이 되었다. 그것도 거의 부모님께서 전도한 사람들이었다. 직업도 성격도 나이도 다양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신천지’였다. 그들끼리 바닷가에 놀러가고 서로의 집에 초대해 식사를 함께 했다. 당시의 나는 부모님께서 친구가 많아져서 예전보다 많이 웃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현상이라고만 생각했다.
 
부모님께서 전도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물불 가리지 않으셨다. 복음방 교사를 하고 계시던 아버지는 시간이 밤에만 난다는 복음방 교육생을 위해 밤 11시에 나가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일용직을 하셔서 늘 새벽 5~6시에 나가시고 저녁 6시에 들어와서 씻고 바로 복음방 교육을 위해 나가신다. 어머니는 당뇨병과 합병증 때문에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지금은 딱히 중요한 직분을 맡지 않는다. 한 때 잠깐 부구역장을 하셨지만 너무나도 바쁜 스케줄 때문에 힘들어서 곧 그만뒀다고 하셨다. 그러나 구역예배나 교회 봉사활동 등에는 자주 참여하신다. 어머니께서 아는 신천지 지인들 중 아이를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가끔 그 사람이 아이를 맡길 데가 없을 때 대신 우리 집에 데려와 돌봐주기도 하셨다.
 
이런 점 때문에 ‘신천지 덕분에 부모님도, 나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구나.’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 긍정적인 느낌은 곧 사라져 버렸다.
<계속>

출처: 교회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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