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천지 첫 걸음 ‘복음방-센터’ 수강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어쩌다 사이비란 말조차도 분에 넘칠 ‘신천지’에 처음 들어간 날이.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06년 겨울이었다. 당시의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부모님이 “신천지라는 좋은 교회가 있다. 그런데 그전에 먼저 ‘복음방’에서 공부하고, ‘센터’ 6개월을 수강한 후 수료시험 만점을 받아야 교회로 들어갈 수 있다. 성경공부를 잘 한 사람만 갈 수 있다.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당시 신천지가 사이비종교라는 것을 나는 잘 몰랐다. ‘사이비종교 하면 무조건 겉모습부터 이상하고 금방 알아챌 것이다’는 터무니없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사이비종교가 우리 주위에는 없겠지’라고만 생각했기에 엄마아빠가 다니는 신천지가 사이비라는 것을 미처 생각 못했다. 한마디로 의심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신천지는 이렇게 나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로 복음방 선생님이라고 하는 20대 언니가 일주일에 몇 번 우리 집에 방문하였다. 주로 우리 집에서 공부를 했으며, 가끔은 동영상을 보여준다고 집근처에 있는 건물에 들어가 공부하기도 했다(아마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가 열리는 곳 같았다. 지금도 계속 유지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로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 구약과 신약의 간단한 요약, 아담과 이브가 왜 죄를 지었는지, 성전, 교회의 진짜 의미 등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가끔 성경 구절의 몇 부분을 똑같이 공책에 옮겨 적게 하는 숙제도 내주었다.
2007년 3월부터 복음방 과정을 마친 후 월화목금 저녁에는 매일 부모님과 함께 ‘신천지학원’이라 불리는 센터에 다녀야 했다. 2007년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느 대학교에 합격했으나 비싼 등록금 때문에 못 다니고 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가르쳐주는 컴퓨터 기술개발원을 다니게 되었다. 매일 기술개발원에서 8시간 공부를 하고 나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몸이 무척 피곤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빨리빨리’ 라고 재촉하셔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허둥지둥 센터에 가야만 했다.
센터에서는 복음방 과정에서 공부했던 것을 더 자세하게 보충해주는 느낌이었다. 성경에는 ‘비유’가 있다고 수도 없이 가르쳤다. 소위 ‘비유풀이’는 쉽고 재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20살의 성인이 된 나에게 엄마아빠가 이미 1번을 수강했다는데도 굳이 나를 위하여 재수강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속기사나 수화통역이 없다는 것이 더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요즘 장애인관련법이 많이 개선되어 청각장애인에
게는 수화통역이나 속기사통역이 필수로 지정되었지만 아직도 일부 대학에서는 지원이 어려워 많은 청각장애 대학생이 수업공부에 큰 불편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신학을 공부한다는데 왜 그 정도의 배려조차도 안 해주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저 다른 사람의 필기 노트만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불만스러워 불평을 했다.
그러자 부모는 그저 ‘열심히 공부하라’고 화만 낼뿐이었다.
내가 다니는 기술개발원에서는 수업할 때 수업내용을 타자로 쳐서 자막으로 보여준다. 그런 형식의 수업을 원했는데 신천지 센터에서는 그럴 인력도, 그런 배려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인지 나 같은 장애인은 한 명도 못 본 것 같다. 강사는 강의를 할 때 오로지 말로만 하고 중요한 단어는 칠판에다 적을 뿐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어떤 청각장애인이 가족 한 명도 없이 혼자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면 공부를 하도록 배려를 해줄까?
솔직히 나는 내가 스스로 원해서 신천지 센터에 다니는 유형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적극적인 권유와 그 곳에 다니신 부모님의 긍정적인 변화를 보고 ‘그렇게 좋은 곳인가?’ 하는 마음도 있었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센터를 다닌 것이 맞다. 원래 늘 화를 내시고 많이 힘들고 지친 모습만 보인 부모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시고, 나한테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하시는 부모님의 변화가 왠지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변하신 걸까?’ 알고 보니 신천지란 곳을 다니신 후에 그렇게 달라지신 것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신천지란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 하던 찰나 부모님께서 다니라고 하시니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7년 8월에는 6개월의 수료과정을 마치고 수료시험을 봤을 것이다. 6개월 동안 청각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 수업방식에 굉장히 불만이 많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수강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 혼자만 불만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차마 불만을 표현하기보다는 그저 부모님이 필기해주는 것을 보고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나 공부 안 해!”라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철없는 딸이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어리석은 21살의 나였다. 그 곳이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다녔는가. 수료 100문제 시험에 합격하겠다고 수능시험을 공부하는 것처럼 밤낮으로 그렇게 열심히 비유풀이 따위를 외워댔던가.
문득 수료시험을 다 보고 났을 때가 생각났다. 열심히 수료시험의 문제를 푸는 나를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던 부모님에게서 자식이 시험에 합격하시길 바라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속으로 ‘무슨 수능시험 응시하는 자녀를 지켜보는 부모님 같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100문제의 답을 미리 기억하고 외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치 진짜 수능시험을 보는 것처럼 열심히 답을 생각하고 썼다.
마침내 시험을 다 보고 난 후에 시험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나의 시험점수는 딱 한 개 틀려서 99점이라고 했다. 청년들의 경우엔 젊고 기억력이 좋으니까 반드시 100점 맞아야 한다고 들었다. 전도사가 약간 낙심하는 나를 보더니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특별히 100점 맞은 걸로 처리할게요.”라고 하셨다. 당시의 나는 그걸 의심도 안 하고 그저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보니 그 때부터 ‘부정시험’, ‘사기’의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시험이란 자고로 정직하게 결과를 반영해야 하건만 전도사 마음대로 시험 점수를 약간 바꾸는 것 자체가 이미 신천지 특유의 ‘거짓말’의 특성이 아닌가?
2007년 9월쯤은 수료식을 한 날로 기억한다. 센터에서 강의한 강사와 다른 강사들은 뭔가 목사님 같은 의복을 입고 있었다. 수강생들은 마치 대학교를 졸업할 때 입는 졸업복과 학사모를 쓰고 있었다. 벌써 7년이나 지나서 당시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똑같은 졸업복을 입고 있는 수십 명의 수강생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수강생도 기억이 난다. ‘그렇게 눈물까지 흘릴 일인가?’ 의아해했지만 6개월 동안 힘들게 공부하고 100문제 시험이라는 난관까지 통과해서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동안 그렇게 힘들게 다니고 아무나 들어오기 어렵다는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하겠다’라고 이해했다. 총회장이라는 사람의 알아들을 수 없는 지루한 설교가 끝난 후에 마침내 본격적인 수료식 의례를 시작했다. 강사들이 수강생이 쓴 모자의 끈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시켜주는 그런 의식이었다.
그렇게 수료식을 마치고 부모님과 함께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을 들어가게 되었다. 의외로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교회는 2층 형태의 건물이었다. 입구가 2개였고 뒷문도 1개가 있었다. 특이하게 교회 입구 근처에는 매점이 있었다.
수료식을 마치고 교회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은 ‘새신자교육’을 약 2주 동안 받아야 했다. 이 교육 역시 또 강사로 보이는 사람이 말로만 설명해서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 번 동영상 자료를 보여주긴 했지만 별다른 재미는 없었다.
2주간의 지루한 교육이 끝나고 수요일 저녁, 일요일 낮에 예배를 드리려 나와야 했다.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릴 때 다닌 교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보통 교회에 흔히 있을 법한 장의자가 없었다. 연로하신 자문회 성도를 빼고 모든 성도들이 바닥에 양반자세를 하거나 무릎을 꿇고 앉아야 했다. 그렇게 하면 무릎이나 허리에 안 좋은데 그 누구 하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모습에 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 기도하는 모습이 사뭇 우습고도 특이했다. 안경을 쓴 사람은 기도할 때 반드시 꼭 안경을 벗어야 한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릴 때 양손은 바닥에 짚어야 하고, 여자는 양손을 무릎 위에 포개놓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다른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기도방식인데도, 신천지 교회 안에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도 서서히 익숙해져서 기도를 드릴 땐 자연스럽게 안경을 벗고 드렸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청각장애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든 설교는 오로지 말로만 했다. 글씨로 보여주는 것은 설교가 다 끝나고 나서 시작하는 광고뿐이었다. 뭔가 좋은 말을 열심히 설교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부모님께서 필기해준 것을 봐도 모든 설교가 다 적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저 물고기같이 우물우물하는 총회장이란 사람이나 강사의 얼굴을 보고만 있다가 지루해지면 딴 짓을 하곤 했다. 주위를 둘려보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상하게도 총회장의 말끝마다 “아멘! 아멘!” 열심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짧고 간단한 말에다 워낙 입을 크게 해서 이 한 마디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기이한 현상에 나는 ‘왜 그렇게 열심히 아멘 하는 것일까? 그렇게 좋은 말씀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하고 같이 다녔다. 그 때 구역장이란 사람이 내가 청년이라 청년회에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청년들끼리 모이는 청년회실로 가게 되었다. 교회보다는 좀 더 활기찬 느낌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구역모임 때는 구역장, 팀장과 알게 되었다. 모두들 친절하고 사근사근하고 잘 대해주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구역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좋은 사람 같았다. 대체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나는 왠지 선뜻 이 분위기에 녹아들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부모님이 다니는 교회니까, 나도 잘 적응해서 열심히 다녀야겠다고만 생각했다.
여전히 신천지가 이단일 줄은 미처 몰랐기에 가능했던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여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니니까, 설마 이상한 곳이겠어?’ 이런 생각을 하고 온갖 의문점들과 의심은 애써 무시했다.
< 계속 >
출처: 교회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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